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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저녁은 있는데 저녁밥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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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11일 고용노동부가 ‘노동시간 단축 가이드’를 내놨다. 개정된 법 적용일이 20일도 채 안 남은 시점이다. 산업현장의 아우성을 고려하면 이제라도 가이드라인이 제시된 게 다행이다. 김영주 고용부 장관이 외유 도중 “대기업과 계열사는 충분히 준비돼 있다”며 느긋한 반응을 보였을 때만 해도 기업과 근로자는 종잡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한데 왜 이렇게 정부는 혼란에 둔감할까. 정책은 왜 이다지도 더딜까. 더욱이 근로시간 단축은 2015년 9월 15일 노사정이 서명한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에 명시된 사안이다. 당시 합의문에는 ‘주당 52시간으로 단축’이라고 적시돼 있다. 심지어 ‘노사가 자율적으로 근로시간 제도 운영’ ‘탄력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현재는 취업규칙에 있으면 2주, 노사가 합의하면 1개월)은 1개월(취업규칙), 6개월(노사합의)로 적용’ ‘재량근로 대상업무 조정’ ‘휴가 소진 촉진’과 같은 구체적인 혼란 방지책까지 합의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정부는 이제 와서 탄력근로제에 대해 “단위기간을 늘릴 여지가 있는지 조사해봐야 한다”(김영주 장관)며 뒷짐을 지고 있다. 법은 시행되는데 지금에서야 조사한다는 게 정부가 취할 태도인지 의아하다. 그나마 노사 자율은 법으로 아예 봉쇄됐다. 노사가 합의해도 일을 더 할 수 없도록 했으니 말이다. 생산성을 걱정하는 기업이나 월급 봉투가 쪼그라드는 근로자는 안중에 없는 느낌이다. ‘저녁은 있는데 저녁밥이 없다’는 비아냥마저 나오는 판이다.

노사정 합의 이후 벌써 3년이 지났다. 준비할 시간치고는 충분했다. 당시 고용부는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대비책 마련에 분주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런 움직임이 싹 사라졌다. 그 사이 노사정 대타협과 관련된 공직자는 적폐로 몰려 정책의 연속성마저 단절됐다. 올 들어 기껏 한 일이라곤 ‘휴일에 근로를 아예 금지하는 방안’을 국회에 냈다가 노사로부터 몰매를 맞았다.

가이드라인은 냈지만 완성본도 아니다. 버스와 같은 업종별 혼란에 대해서는 관계부처 간에 협의 중이다. 근로자의 삭감되는 임금은 생산성 향상으로 보전해야 하는데, 그런 대책도 없다. 임금을 성과나 생산성이 아닌 ‘시간’으로 책정하는 관행을 짊어지고 가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다. 3년 전 노사정 대타협을 들춰보라. 해결 방향이 들어있다. 법이 통과되고서야 허둥대는 정부를 지켜보는 산업현장의 한숨이 더 깊어지기 전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