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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 되어 식당·마트 돌아다닌 남편 "둘째는 절대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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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섭씨가 임신체험복을 입고 있다. [사진 김경섭씨]

김경섭씨가 임신체험복을 입고 있다. [사진 김경섭씨]

"10분도 안 지났는데 배가 찢어질 것 같고 숨이 막혀 '스톱'을 외쳤다."
지난해 8월, 엔지니어 김경섭(31)씨는 경기 남양주의 한 산부인과에서 출산 진통 체험을 했다. 임신 9개월 차 아내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0시간 동안 산통을 겪는 세상의 어머니들이 존경스럽다"며 이같이 말했다.

남성들 "체험 후 여성, 아내 좀 더 이해"

'임신체험'을 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최근 여성인권에 대한 관심과 육아·출산이 더는 여성만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늘고 있어서다. 과거 일부 남성들이 아내의 권유와 호기심 때문에 체험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임신체험은 만삭 상태를 재현한 임신 체험복을 입어보는 것 이외에도 특수 장비를 이용해 출산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산모가 겪는 고통을 8~10단계로 볼 때, 산통체험은 고통 강도를 1~10단계 중 선택할 수 있다. 일반인들은 7단계도 견디기가 어렵다고 한다. 체험복의 경우 무게는 약 7~8㎏. 착용하고 있으면 허리·어깨 통증 등 만삭 임산부의 고충 절반은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조정원씨가 출산 진통체험을 하고 있다. [사진 김수진씨]

조정원씨가 출산 진통체험을 하고 있다. [사진 김수진씨]

남성들은 임신체험을 한 뒤 아내나 임산부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알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전북 군산에 거주하는 주미라(37)씨의 남편 장경배(37)씨는 이틀 동안 체험복을 입은 채 집안일을 하고 식당과 마트를 돌아다녔다. 주씨는 "남편이 '누워있거나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하며 소파를 선물해줬다"고 말했다.

직접 임신 체험복을 구매한 남편 이상윤(33)씨는 "허리가 아프고 소화도 잘 안 돼 4시간 만에 체험을 중단했다"고 전했다. 친언니가 임신하자 형부에게 체험복을 선물한 천희연(26)씨는 "체험복을 입은 후 형부가 '둘째는 절대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권선미(33)씨는 "아이가 주는 기쁨도 있지만 임신과 육아가 쉽지 않다는 걸 예비부부들이 알았으면 한다"고 했다.

임신체험은 인기, 임산부 배려는 미흡  

경기도의 한 산부인과는 산통체험을 하려는 부부들이 몰려 지난 2월에 이미 올 한해 예약이 마감됐다. 임신 체험복을 직접 구매하는 부부들도 있지만 판매가가 약 30만원으로 고가다 보니 지난해 9월에는 임신체험복 대여 업체도 생겼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산모들끼리 서로 체험복을 대여해주기도 한다. 관악구보건소, 전주시보건소 등에서도 무료로 빌릴 수 있다.

보건소에서 지정한 임신체험복 미션은 '집 청소' '계단 오르기' '체험복 입고 잠자기' 등이다. 관악구보건소 관계자는 "임산부 배려 분위기를 조성하고 공동양육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지난 1월부터 대여서비스를 시작했다"며 "임신체험 후 아내에게 '누워만 있으면 다해줄게'라고 말했던 남편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윤성진씨가 임신체험복을 입고 집안일을 하고 있다. [사진 이지은씨]

윤성진씨가 임신체험복을 입고 집안일을 하고 있다. [사진 이지은씨]

이처럼 임신체험이 확산되고 있지만 임산부를 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나 제도는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임산부 3212명과 일반인 740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임산부 10명 중 4명은 "배려받은 경험이 없다"고 답했다. 근무시간이나 업무량 조절을 받은 임산부는 11.3%에 불과했다.

아내는 남성에게 공감을 구하기 위해 임신체험복을 권하지만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체험복 대여업체 관계자는 "꾸준히 대여문의가 늘고 있지만 아내가 체험복을 빌려도 남편이 거부해 종종 바로 반납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임신체험, 여성 삶에 대한 공감 계기로 이어져야" 

전문가들은 남성이나 미혼 여성들의 임신체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임신체험의 소비를 경계했다. 이상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실장은 "임신체험은 머리로만 임산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임산부의 고통을 감각으로 느낌으로써 여성의 삶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계기 될 수 있다"면서도 "임신체험이 단순히 재미를 위해 소비되거나 임산부를 희화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페미니즘의 확산뿐 아니라 돌봄 노동에 대한 남성들의 관심도 증가하면서 임신체험이 인기를 얻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임신체험을 해도 출산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임신체험이 일종의 놀이로 끝나면 안 된다"며 "남성과 여성이 육아를 함께하는 북유럽형 '보편적 돌봄모델'을 정착시키기 위한 제도 마련과 인식개선 교육도 병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지아 기자 kim.jia@joongang.co.kr

임신체험복 직접 입어보니...

지난 8일 오후 임신체험복을 입은 기자가 서울 중구 소공동 주민센터에서 사전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섰다. 김지아 기자

지난 8일 오후 임신체험복을 입은 기자가 서울 중구 소공동 주민센터에서 사전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섰다. 김지아 기자

처음에는 앞에 무거운 가방을 하나 더 메는 정도로 생각했다. 지난 6일 서울 관악구 보건소에서 임산부 체험 키트를 대여했다. 체험 키트를 열면 체험조끼와 사용 설명서, 요통 방지 벨트가 나온다. 체험복 복부 안쪽 노란 패드에 핫팩을 붙여 사용하면 임산부의 체온상승 및 혈압상승을 체험할 수도 있다.

8일 오전, 도움을 받아 요통 벨트를 착용하고 어깨끈과 등벨트를 고정시켜 체험복을 착용했다. 만삭의 임산부 모형으로 설계된 체험복은 약 7㎏. 오전 일과부터 오후까지 약 4시간 30분 동안 체험복을 입고 활동했다. 체험복 디자인 때문인지 이목이 집중됐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6·13 지방선거 사전투표를 위해 서울 중구 소공동 주민센터를 찾았다. 안내인은 "줄을 기다리며 계단을 올라 4층에서 투표를 하려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1층부터 4층까지 20분이 걸렸다. 무릎과 허리보다는 어깨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실제 만삭의 임산부라면 줄을 기다리며 4층까지 올라가 투표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어깨와 무릎이 뻐근했다. 지하철에 자리가 나 재빠르게 앉았다. 김지아 기자

시간이 지나자 어깨와 무릎이 뻐근했다. 지하철에 자리가 나 재빠르게 앉았다. 김지아 기자

투표를 하고 돌아가다 실제 임산부를 만났다. 임신 8개월 차 직장인 이효주(32)씨는 "임신한 뒤 10㎏이 늘었고 다리나 무릎 인대가 늘어나는 게 느껴진다"면서 "(임신 체험이)호르몬 변화나 입맛이 없는 부분은 다 느낄 수 없지 않냐"고 물었다. 이어 "이런 노력도 나쁘진 않지만 공감을 위해서는 대화가 가장 좋다. 내 아내는 얼마나 힘들지 어떻게 하면 (임산부의)어려움을 도울 수 있을지 많이 찾아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후 일과 이동을 위해 지하철에 탔다. 문이 열리자마자 앉기 위해 자리를 찾았다. 앉을 요량은 아니었지만 임산부석이 비어있나 눈길을 돌렸다. 내가 실제 임산부라면 '나를 위한 자리'에 남성이 잠자코 앉아있다면 분명 답답하고 기운이 빠질 것이다. 더 빠질 기운이 없을 지도 모른다. 홍대 입구역에 내리니 더위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기엔 힘들 것 같아 택시를 타고 회사로 돌아왔다. 어깨끈을 풀고 땀에 젖은 체험복을 벗었다. 홀가분했다. 두 배는 더 시원해졌다.

이씨의 말처럼 임신체험복은 물리적인 무게만 체험이 가능하다. 여성이 느끼는 신체적·감정적 변화는 알 수 없다. 실제 임신한 여성들은 임신·출산에 대한 두려움, 육아 부담, 경력단절도 고민한다. 고작 몇 시간 체험복을 입었다고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일부라도 느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다만 여성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남성이 늘어나면, 임신 전과 후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과 부당함이 더 공감을 얻어 변화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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