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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불허의 감정변화로 상대방 흔드는 '트럼프식 협상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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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류재언의 실전협상스쿨(19) 

상대방이 일관된 감정을 유지하거나, 상대방이 화를 내다가 행복감을 표시할 때보다 상대방이 행복감을 표시하다가 협상 도중 화가 난 상태로 바뀐 경우 가장 많은 것을 양보했다. [사진 Freepik]

상대방이 일관된 감정을 유지하거나, 상대방이 화를 내다가 행복감을 표시할 때보다 상대방이 행복감을 표시하다가 협상 도중 화가 난 상태로 바뀐 경우 가장 많은 것을 양보했다. [사진 Freepik]

협상 테이블에서 감정 변화를 배제하는 것이 협상 결과에 도움이 될까? 싱가포르 인시아드(INSEAD)의 알란 필리포위츠(Allan Filipowicz)와 와튼스쿨의 시갈 바르세이드(Sigal Barsade), 시물 멜와니(Shimul Melwani) 연구팀은 협상 테이블에서 참가자들의 감정변화가 협상 결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했다.

실험결과는 놀라웠다. 학생들은 상대방이 일관된 감정을 유지하거나 상대방이 화를 내다가 행복감을 표시할 때보다, 상대방이 행복감을 표시하다가 협상 도중 화가 난 상태로 바뀐 경우 가장 많은 것을 양보했다.

노련한 협상가, 감정변화 드러내며 상대방 흔들어 

이 실험 결과를 분석해보면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방이 일관되게 화를 내거나 일관되게 행복한 감정 상태인 경우 사람들은 이를 상대방의 기질적인 요인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상대방이 처음에는 행복한 상태였는데 협상 과정에서 화를 내는 경우 협상 당사자는 이를 상황적인 요인으로 받아들인다.

협상 과정에서 본인이 실수했거나 지나친 요구를 해서 상대방의 감정 상태가 바뀐 것으로 생각해 일종의 미안함을 느끼게 되고, 이것이 양보를 해주게 되는 심리적 동인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노련한 협상가는 이렇게 감정 변화를 적절히 드러내어 상대방의 감정을 뒤흔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역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을 불과 20일 앞둔 지난 5월 24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회담 취소 내용을 담은 공개서한을 백악관 홈페이지에 전격 공개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김정은을 “매우 열려있고(very open) 매우 훌륭하다(very honorable)”고 칭찬하며 북미회담에 강한 기대감을 표한 트럼프였다. 그러나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 마이크 펜스 부통령 등 미국의 고위관리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자 이 상태로 회담을 진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초강수를 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했다.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서한에는 북한 측이 보인 언행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 실망감이 표현돼 있었다. 최악의 경우 미국이 우월한 핵(核) 역량으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슬프게도 귀측의 최근 성명에서 나타난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인 적대감에 근거해 보자면, 저는 이 시점에서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이번 회담을 진행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양국을 위해, 세계 평화의 측면에서는 손해가 되겠지만, 싱가포르 회담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를 이 서한을 통해 밝힙니다. 귀하께서는 북한의 핵 역량을 말하고 있으나, 미국의 핵 역량은 너무 거대하고 강력해서 신께 절대로 그것들이 사용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와 함께 북한이 이제껏 진지하게 협상에 임하며 노력해 온 부분과 협상 과정에서 억류된 미국인 3명을 석방해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함을 표했다. 또 협상 재개의 여지가 있으며 이를 희망하고 있다는 속내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귀하와 저 사이에 멋진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고 느꼈고, 궁극적으로는 대화 그 자체가 중요할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언젠가 귀하와 만날 날을 무척 고대합니다. 한편으로 억류자들을 석방해 그들이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그 결정은 매우 훌륭했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입니다. 최고로 중요한 이번 정상회담과 관련해 만약 마음을 바꾸신다면 지체 없이 전화나 편지를 주기를 바랍니다. 세계는, 그리고 특히 북한은 영속적 평화와 훌륭한 번영과 부를 이룰 커다란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는 진정 역사에서는 슬픈 순간입니다.”

노련한 협상가인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실망감, 아쉬움, 슬픔, 분노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은 공개서한을 통해 북한이 계속 삐딱하게 나오면 ‘먼저 판을 깰 수 있다’는 협박을 했다. 이와 동시에 이전처럼 진지한 태도로 협상에 임할 의사가 있다면 언제든지 협상 테이블에 앉아 북한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있다는 바람을 드러내며 김정은 위원장을 뒤흔들었다.

트럼프의 협박성 서한에 꼬리 내린 북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6·12 북·미 정상회담 취소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EPA]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6·12 북·미 정상회담 취소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EPA]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공개서한에 북한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낸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1부상은 미국의 공개서한 발표 7시간 만에 “우리는 항상 대범하고 열린 마음으로 미국 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 첫술에 배가 부를 리는 없겠지만 한 가지씩이라도 단계별로 해결해나간다면 지금보다 관계가 좋아지면 좋아졌지 더 나빠지기야 하겠는가 하는 것쯤은 미국도 깊이 숙고해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회담 취소 재고를 촉구하며 트럼프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공개서한을 통해 드러낸 감정의 변화와 강력한 메시지를 통해 북한의 태도와 행동에 변화를 만들어냈고, 미국은 이를 계기로 북미협상의 판세를 뒤집고 주도권을 잡으며 협상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협상에 있어 감정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노련한 협상가는 자유자재로 감정을 활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과하게 드러내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잘만 활용한다면 감정은 협상에 있어 위대한 자산이 될 수 있다.

글로벌협상연구소장 류재언 변호사 yoolbonla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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