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공간의 재생산

중앙선데이

입력 2018.06.0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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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7호 35면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모든 중립적인 ‘장소’를 의미로 가득 찬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인간들이 발을 들이고 만지기 이전에, 장소는 단순한 물리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장소는 인간에 의해 가공되고 변형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런 점에서 모든 공간은 인간에 의하여 ‘생산’ 혹은 재생산된다. 이것이 앙리 르페브르가 말하는 ‘공간의 생산’ 혹은 ‘공간적 실천’이라는 개념이다. 건축가 승효상도 건축을 “지문(地紋, 地文, landscript)”이라고 하였다. 건축이라는 공간 역시 땅에 쓰여진 인간 삶의 다양한 무늬들 혹은 문장들이라는 뜻이다. 장소는 그 위에 인간의 삶이 얹혀 지면서 다양한 의미를 축적한다.

지난 4월 27일 우리는 판문점이라는 장소가 유례없이 새로운 공간으로 ‘생산’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판문점은 지금까지 적대적 대립, 공포와 악몽의 상징이었다. 고려인 출신 러시아 화가인 변월룡의 작품 중에 ‘1953년 9월의 판문점 휴전회담장’이라는 그림이 있다. 정전협정이 발표된 지 두어 달 후 판문점 회담장의 모습을 사진처럼 냉정하게, 아무런 감정의 개입이 없이 재현한 작품이다. 푸른색, 흰색의 보가 덮여 있는 테이블과 앙상한 철제 의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모습 속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언제고 다시 시작될지도 모를 전쟁의 공포와 침묵이 사람 없는 회담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로부터 근 65년 동안 황량한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논쟁, 고성, 그리고 진땀 어린 대화가 오갔을까. 그동안 얼마나 자주 우리는 전쟁의 재발 가능성 때문에 오금을 저려왔던가.

삶의 향기 6/9

삶의 향기 6/9

판문점 회담은 정치가 어떻게 공간의 의미를 바꾸어 놓는지 잘 보여준다. 회담의 궁극적 성과야 남북한 국민 모두의 몫이지만, 우리는 두 정치 지도자가 보여준 파격의 행보들을 손에 땀을 쥐면서 바라보았다. 김정은 위원장의 거침없는 농담, 과음의 기미까지 보인, 직장 회식을 방불케 하는 만찬, 재떨이가 놓인 도보다리에서의 야외 회담은 인간이 어떻게 공간을 휘저으며 그것을 전혀 다른 의미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게다가 남북 지도자가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퍼포먼스는 분단의 ‘철벽’이 생각하기에 따라 얼마나 하찮은 장벽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유쾌한 풍경이었다. 파격을 가미한 남북지도자들의 ‘공간적 실천’에 의하여 판문점은 공포의 공간에서 평화의 공간으로 순식간에 재생산되었다.

이제 며칠 후면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열린다.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를 거쳐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독립의 과정을 거친 작은 섬나라이다. 싱가포르라는 국명은 ‘사자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싱가뿌라(Singapura)’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회담 장소는 싱가포르 남부의 센토사 섬에 있는 카펠라 호텔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센토사 섬은 말레이어로 ‘평화와 고요’를 의미한다. 평화롭고 고요한 고급 휴양 도시에 갑자기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폭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한반도에서 전쟁의 역사를 종식할 허리케인이 될지 김빠진 풍선이 될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것이다.

각국의 ‘사자’들이 저마다 고유한 이념과 이해관계에 기반 하여 힘겨루기를 한 결과 여기까지 왔다. 이것은 수많은 필연과 우연의 날실과 씨실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게임’이다. 이 게임엔 정해진 규칙도 없으며 언제든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무규칙의 규칙이 이 게임의 규칙이다. 이 불확실성의 ‘언어 게임’이 센토사 섬에 어떤 ‘사건’을 기록할지 아무도 속단하지 못한다. 모두가 열망하는 대타협, 전쟁종식의 문장들이 센토사라는 ‘장소’에 써질 때, 센토사는 고급관광지에서 그 이름대로 ‘평화와 고요’의 ‘공간’으로 재생산될 것이다. 센토사의 ‘공간 생산’이 한반도의 새로운 ‘공간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고대한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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