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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민주 사회에 특권 계층이 있다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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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7호 35면

복거일 소설가

복거일 소설가

모든 사회적 논점들엔 성적 측면이 있다. 성이 생명의 근본적 현상이니, 당연하다. 성의 본질을 살피는 것은 그래서 차분한 논의에 도움이 된다.

여성이 주도하는 생식 과정 #가임기 여성은 특권 계층 돼야 #공중화장실 이용 두려워할 만큼 #우리의 사회적 배려 크게 부족 #여성 안전에 대한 투자도 빈약

성의 본질은 유전자 뒤섞음(gene-shuffling)이다. 다른 개체들의 유전자들을 뒤섞어 새로운 유전자를 지닌 개체들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변이들이 나와야, 자연선택을 통해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한 개체들이 퍼질 수 있다.

유성생식을 하는 종들은 유전자 뒤섞음을 정교한 과정으로 진화시켰다. 남녀의 성세포들이 만나는 일이 힘들고 혼란스러우므로, 한쪽이 유전적 자산을 모두 지닌 채 기다리고 다른 쪽이 간편한 차림으로 찾아오는 것이 간명하다. 사람의 경우, 난자는 정자보다 몇만 곱절 크다. 반면에, 길고 힘든 여행을 해야 하는 정자가 난자보다 여섯 곱절 가량 오래 산다.

부모가 자식에게 유전자를 똑같이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세포핵에 든 유전자들은 반반이지만, 핵 밖에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모계로 이어진다. 정자의 미토콘드리아는 수정 후에 파괴된다. 운동성을 키우기 위해, 정자는 원형질을 모두 버린다. 그래서 수정란은 원형질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다.

임신은 유전 정보라는 설계도에 따라 태아라는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한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이다. 이 엄청난 사업은 유전 정보의 기계적 복사가 아니다. 유전 정보의 발현은 환경에 대한 적응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수정란의 환경은 모체이므로, 태아는 모체에 의해 결정적 영향을 받는다. 실은 소량의 모체 세포들이 태아 속으로 들어가서 발육을 돕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어머니의 세포들을 조금 지닌 키메라(chimera)다.

이어 태아는 모체의 박테리아를 물려받는다. 우리와 공생하는 박테리아는 우리보다 세포는 몇 곱절 많고 유전자는 몇십 곱절 많다. 박테리아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므로, 사람은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과 박테리아의 복합체라고 보아야 옳다. 태아는 그렇게 중요한 박테리아를 모두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다.

출생 뒤에도 어머니의 역할과 영향은 줄지 않는다. 아기는 어머니를 통해서 세상에 관한 지식들을 얻는다. 특히 중요한 지식은 모유를 통해서 얻는 면역력이다. 모유는 어머니가 먹은 음식에서 만들어지므로, 모유를 먹고 자란 아기는 어머니의 음식 취향을 따르게 된다.

이처럼 생식은 여성이 주도한다. 자식은 주로 어머니의 작품이다. 아버지의 몫은 통념보다 훨씬 작다. 여성이 유전 정보를 아이로 다듬어낼 때, 남성은 여성의 생존을 도와서 간접적으로 공헌한다.

대부분의 종들에서 남성은 정자를 제공하고 끝난다. 고등 동물들에선 남성의 공헌이 크다. 사람의 경우, ‘남성 부모투자’라 불리는 이런 공헌은 극대화되어서, 부성애가 모성애에 가까운 수준에 이르렀다. 이처럼 극대화된 남성 부모투자가 인류 문명을 낳은 힘들 가운데 하나다. 자연히, 여성으로선 남성의 충실한 협력을 확보해야 한다. 결혼은 본질적으로 남성 부모투자의 확보를 위해 진화한 제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여성과 남성이 협력해서 길고 어려운 생식 과정을 잘 치른다는 사실이다. 여성과 남성은 난자와 정자 시절부터 대조적이지만, 실은 그렇게 대조적인 덕분에, 생식 과정에서 완벽하게 협력한다. 남녀 사이의 갖가지 갈등들은 모두 그런 협력에서 나온다. 애초에 협력이 없었다면, 갈등도 없었을 것이다.

무릇 삶의 기본 질서는 협력이다. 다른 종들 사이의 공생에서 이 점이 이내 드러난다. 우리 자신이 공생의 산물이니, 위에서 살핀 미토콘드리아의 모계 유전은 미토콘드리아가 세포핵과는 다른 박테리아에서 나왔고 둘이 공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개체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가 모든 사회들의 구성 원리다.

사회는 생식 과정을 여성이 주도한다는 사실을 늘 인식해야 한다. 미국 철학자 윌 듀런트의 말대로, “여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을 보호해야 하니, 인류가 자신의 영속과 힘을 얻을 때 기대는 것은 여성이다.” 민주 사회에 특권 계층이 있다면, 그것은 가임기의 여성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크게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신체적 안전과 사생활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성과 성범죄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너무 자주 드러낸다. 성욕은 자제하기 어려우므로, 성범죄는 격리가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다. 그러나 성범죄자들이 아무런 교화도 받지 않은 채 이내 사회로 풀려 나온다. 정부 예산은 팽창하지만, 여성의 안전에 대한 투자는 빈약하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한밤에 젊은 여성이 혼자 다닐 수 있는 사회’라고 외국인들이 감탄했었다. 요즈음엔 여성들이 공중화장실 이용을 걱정하게 되었다. 위정자들이 이 문제에 마음만 쓴다면, 그리 큰 자원을 들이지 않고도, 위험을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복거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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