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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세계] 핵이 北 지켜줄 '절대반지'? 천만에, 당한 나라 많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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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을 바라보며 연신 시가를 피우는 이 남자의 표정이 비장합니다.
때는 냉전의 기운이 엄혹하던 1960년대. 미국 공군 소속 잭 리퍼 장군의 눈에 이 나라는 완전히 썩었습니다. 수뇌부에는 ‘빨갱이’들의 은밀한 공격을 눈치채지 못하는 무능한 이들만 있을 뿐이죠.

‘내가 이 나라를 빨갱이들에게서 지켜낼 거야.’

결심한 그는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립니다. 소련에 핵폭탄을 투하하란 지시였죠. (소련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감히 일개 장군 따위가!' 이런 일을 상상조차 못 했던 미국 대통령은 긴급회의를 소집합니다. 그러나 리퍼 장군이 아무나 이 명령을 취소할 수 없도록 암호를 걸어놨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점점 더 아수라장이 되어가죠.

냉전의 공포로 머리가 살짝 이상해진 한 장군 때문에 전 세계가 핵 전쟁의 위협에 휩싸인 겁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한 장면. 미국 대통령이 핵 전쟁을 막기 위해 긴급회의를 소집한 모습.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한 장면. 미국 대통령이 핵 전쟁을 막기 위해 긴급회의를 소집한 모습.

‘샤이닝' ‘시계태엽 오렌지’ 등을 만든 거장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1964년 발표한 블랙코미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얘깁니다.

이제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 여덟 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한 장면. 엄청난 지시가 떨어질 걸 모르고 한가롭게 '플레이보이'를 읽고 있는 전투기 조종사의 모습.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한 장면. 엄청난 지시가 떨어질 걸 모르고 한가롭게 '플레이보이'를 읽고 있는 전투기 조종사의 모습.

전 세계의 시선이 다음 주 열릴 북ㆍ미 정상회담에 쏠려 있습니다.

핵심은 북한의 비핵화죠. 북한은 ‘내가 뭔가를 할 때마다 너도 보상해 줘’라는 단계적 비핵화를 원하고, 미국은 ‘네가 일단 다 없애면 그때 보상해줄게’하는 식의 일괄타결을 주장하고 있어 샅바 싸움이 만만치 않은 모양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일 백악관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가져온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보여주고 있다. [댄 스카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 국장 트위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일 백악관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가져온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보여주고 있다. [댄 스카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 국장 트위터=연합뉴스]

원래도 핵 야욕이 있던 북한이 핵 개발을 지상목표로 삼은 건 1989년 동유럽 공산정권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질 때였습니다.

특히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혁명으로 일어선 시민들에게 무참히 총살당하자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는 패닉에 빠졌죠. 김일성은 차우셰스쿠와 친분이 돈독했거든요.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한 소련 정부는 북한에 무기를 비롯한 경제 원조를 끊고, 90년 한국과 수교를 맺습니다. 1992년에는 중국마저 한국과 국교를 맺죠.

절친들의 ‘배신’, 결정적 순간에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란 공포가 김일성ㆍ김정일 부자에게 엄습했습니다. 이후 핵 개발이 곧 체제 생존과 동의어가 된 거죠.

“김일성이 핵무기에 손을 뻗은 이유는 이러한 급변한 환경 때문이었다. (중략) 북한이 영변 지역에 핵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다. 체제 생존을 위해 북한은 미국을 교섭의 장으로 유인해 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책 <잡학 콘서트-핵, 과학이 만든 괴물>에서)

이런 생각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그대로 전달됐고, 지난해 겨울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미사일 발사 성공에 환호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모습. [사진 평양 조선중앙통신]

미사일 발사 성공에 환호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모습. [사진 평양 조선중앙통신]

이런 역사가 있으니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국제사회가 의구심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말 비핵화를 이행한다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용기를 내는 일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죠.

흔히 ‘핵 억제력’이라고들 하죠?

엄청나게 센 핵무기가 있으면 그 피해가 두려워 서로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이론입니다.
이 때문에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군비 경쟁에 박차를 가했고, 그 덕분인지(?) 몰라도 1945년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후 지금껏 핵 전쟁은 없었죠. 북한이 핵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이 ‘억제력’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소련의 핵무기 또한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화 속 리퍼 장군은 적군을 공격합니다.
비록 영화 속 얘기지만, 왜 그에겐 ‘핵 억제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걸까요?

영화 &#39;닥터 스트레인지러브&#39;의 한 장면. 소련에 핵폭탄이 투하되는 순간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

영화 &#39;닥터 스트레인지러브&#39;의 한 장면. 소련에 핵폭탄이 투하되는 순간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실제 역사 속에서도 이런 ‘핵 억제력’이 제대로 발동하지 않은 순간이 꽤 있었다는 겁니다.

영미안보정보협의회(BASIC)의 핵무기재고프로젝트(Rethinking Nuclear Weapons project) 선임연구원이자 핵군축전문가 워드 윌슨은 저서 『핵무기에 관한 다섯 가지 신화』에서 “핵 억제는 실패할 수 있으며 실제로 여러 번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사례들도 설득력 있게 제시하죠.

윌슨이 꼽는 첫 번째 사례는 ‘쿠바 미사일 위기’입니다.

1962년, 소련이 핵탄도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 하자 미국이 ‘그렇게 하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발표해 핵 전쟁 직전까지 갔던 사건이죠. (미국 턱밑에 위치한 공산국가 쿠바는 소련과 당연지사 특수관계였습니다) 

다행히 외교적 노력 끝에 소련은 기지 건설을 중단했고, 미국은 터키의 미사일 기지를 철수시키며 상황은 종료됐습니다. 이후 쿠바 위기는 ‘핵 억제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대표적 예로 꼽혀왔죠.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자 해상봉쇄 명령에 서명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사진=JFK도서관]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자 해상봉쇄 명령에 서명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사진=JFK도서관]

그런데요, 윌슨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대통령이던 존 F 케네디는 소련의 미사일 기지 계획을 알게 된 후 쿠바에 들어가는 모든 군사 물자에 대한 해상봉쇄를 명령했습니다. ‘쿠바를 향한 어떤 조치라도 전쟁을 부를 것’이란 소련의 경고에도 이를 감행한 겁니다. 미국의 군사력이 우위인 건 분명했지만, 소련에도 어마어마한 핵무기가 있었는데 말이죠.

“핵 전쟁의 위험이 분명히 있었고, 케네디는 그것을 인식했으며, 미국이 더 많은 무기를 보유하고 있단 사실이 위기를 전혀 감소시키지 못했음에도, 결국 케네디는 쿠바 해상봉쇄를 선택했다. 이는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핵 억제는 실패했다.”  

저자는 심지어 한국전쟁도 핵 억제가 실패한 사례라고 말합니다.

미국이 핵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B-29 폭격기를 태평양 기지에 파견하며 이를 대대적으로 알렸는데도, 중공군이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에 개입했다는 거죠. 1973년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가 핵무기 보유국인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 또한 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핵은 어쩌다 ‘날 지켜주는 절대반지’로 여겨지게 되었을까요?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왼쪽)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사진=위키피디아]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왼쪽)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사진=위키피디아]

핵무기 반대론자들은 ‘핵 신화’가 탄생한 1945년 8월(제2차 세계대전 말미)의 상황을 다시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을 당시 일본 대부분 도시는 이미 폭격으로 처참히 파괴된 상태였다는 거죠.
폭격당한 68개 도시 중 파괴 규모로 따졌을 때 히로시마가 '여섯 번째'였을 정도로 재래식 공격과 핵 공격의 차이가 두드러질 만큼 크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원자폭탄보다는 소련의 선전포고 때문에 일본이 항복했다는 역사적 사료 또한 제시하고 있고요.

그럼에도 자신들의 전략적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일본과 원자폭탄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져서 ‘원자폭탄이 일본을 무릎 꿇렸다’는 것이 기정사실이 됐다고 역사 수정주의자들은 비판합니다.

일본 입장에선 ‘첨단무기 때문에 진 거지, 우리 전략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냐’라는 게 더 마음 편했단 얘기죠.
이후 냉전 시대가 시작되면서 핵무기의 신화는 점점 더 굳어져 갔습니다.

영화 &#39;엑스맨: 퍼스트 클래스&#39;의 한 장면. 핵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영화 &#39;엑스맨: 퍼스트 클래스&#39;의 한 장면. 핵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물론 핵무기가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가진 무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1945년의 원자폭탄보다 발전된 현재의 핵무기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것이겠죠.
그러나 ‘핵무기는 전능하다’는 절대적 명제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생각할 때, 인류는 좀 더 평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이야기로 돌아와서.
사실 소련에는 미국의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둠스데이 머신’(최후의 날 무기)이 있었습니다. 소련 땅이 핵 공격을 받으면 자동 발사돼 전 세계를 휩쓸어버리는 무기였죠.

결말이요?
'이러니 제발 정신들 차리시라'는 감독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만나게 될 싱가포르의 카펠라 호텔 [로이터=연합뉴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만나게 될 싱가포르의 카펠라 호텔 [로이터=연합뉴스]

다행인 건, 마치 ‘둠스데이 머신’을 개발한 듯 “내 손 안에 핵 단추가 있다”고 서로에게 막말을 쏟아붓던 북한과 미국의 두 정상이 대화를 시작했다는 겁니다. 서로를 향한 언행은 조금씩 부드러워졌고, 예우를 갖추기 시작했죠.

그러니 북ㆍ미 정상회담의 결말이 해피엔딩이길 바랍니다.
수많은 반전영화가 결국은 ‘평화와 사랑’으로 끝을 맺는 것처럼요.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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