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포항여중 전투 학도병들, 그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했던 이우근(당시 17세·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보내기 위해 전투 중에 쓴 편지. [중앙포토]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했던 이우근(당시 17세·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보내기 위해 전투 중에 쓴 편지. [중앙포토]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명은 될 것입니다.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중략)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중략)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군번없는 학도군의 육탄 사수 #포항여중 전투에서 48명 전사 #어머니에 보내는 편지 안고 숨져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정부는 무공훈장조차 안줘 #학도군 회장 “명예 찾고 싶다”

1950년 8월 11일 새벽 4시반. 포항여중에서 북한군 정규부대와 국군 학도의용군과의 전투가 발생했다. 북한군은 그 해 6월25일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을 일으킨 이후 서울을 3일 만에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이어 전략 요충지인 포항을 장악하기 위해 8월1일부터 다시 공세를 폈다. 국군은 경북 포항 북쪽의 왜관과 영덕 등에서 낙동강 동해안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북한군 2군단의 강공으로 방어선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국군 3사단은 피난민들과 함께 철수해야 할 정도로 위급했다. 당시 포항에는 많은 군수물자와 중요한 영일 비행장도 있었다. 포항이 뚫리면 경주-울산까지 속수무책으로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질 판이었다.

그때 수도사단에는 87명의 학도병이 종군하고 있었다. 김석원 수도사단장이 국군 3사단장으로 보직이 바뀌면서 학도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도 학도병들 가운데 71명은 귀가하지 않고 김 사단장을 따라 포항으로 갔다. 8월 10일 학도병들은 3사단 후방사령부가 있던 포항여중에 임시 대기했다. 하지만 말이 후방사령부이지 포항여중에는 연락장교와 20여 명의 군악대뿐이었다. 전투부대 대부분은 영덕지역에서 북한군 5사단과 치열한 공방 중이었기 때문이다. 학도병들은 8월 10일 M1 소총과 실탄 250발씩 새로 지급받았다. 이미 몇 차례 전투를 치른 이들은 학도병 가운데 중대장을 투표로 뽑았다. 이날 자체 훈련과 총기 정비를 마친 뒤 자정이 넘어서야 교실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그것도 잠시.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가 포항 시내에서 들렸다. 북한군(인민군 766 유격대)이 새벽에 포항에 진입하면서 4시반에는 포항여중 앞에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학도병 중대는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2개의 소대로 나눠 북한군이 다가오기까지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이들은 북한군이 20m 앞까지 다가오자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북한군 정규부대가 기습을 받은 것이다. 전투는 정오를 넘기면서 계속됐다. 오후 1시쯤 탄약과 수류탄이 모두 동났다. 실탄 창고의 문을 부수고 약간의 실탄과 수류탄을 보충했지만 금세 떨어졌다. 실탄이 없자 북한군이 던진 수류탄을 주워서 다시 내던지기도 했다. 급기야 사단사령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무전기로 연락했지만 통신은 되지 않았다. 사령부는 전세가 위급해지자 학도병 중대가 방어하고 있던 틈을 타 후퇴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사령부와 통신하려고 무전기를 들고 뒷산에 올랐던 중대장도 북한군이 쏜 총에 목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제 남은 건 M1 소총에 꽂힌 총검과 육탄뿐이었다.

서울 국립현충원 무명용사탑 뒤에 설치된 포항여중 전투 전사자 유골함. 당시 48명이 전사했으나 10명의 신원만 확인돼 이 화강암 속에 모두 합장했다. 최정동 기자

서울 국립현충원 무명용사탑 뒤에 설치된 포항여중 전투 전사자 유골함. 당시 48명이 전사했으나 10명의 신원만 확인돼 이 화강암 속에 모두 합장했다. 최정동 기자

편지는 계속됐다.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그런데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 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적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어머니도 형제들도 다시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편지는 당시 참전했던 이우근(당시 17세·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학도병이 전투 중에 작성한 것이다. 군번도 없었던 그는 못다 쓴 편지를 가슴에 안은 채 전사했다. 포항여중 전투는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을 마지막 육탄돌격 백병전으로 맞선 학도병들의 희생으로 끝났다. 이들이 11시간가량 사투를 벌이며 북한군 공세를 저지한 덕분에 포항 시민과 피난민 등 20만여 명은 형산강을 넘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무사히 철수한 국군 3사단도 전열을 정비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간 포항을 사흘 뒤인 14일 수복했다. 그 결과 낙동강 전선이 더 이상 뚫리지 않고 유지됐다. 2010년 6월 개봉된 영화 ‘포화 속으로’(연출 이재한, 주연 권상우·차승원)의 실제 상황이다.

손주형(구 손용길)학도병의용군회장.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71명의 학도병 중에서 손씨를 포함해 현재까지 두명 생존해 있다. [중앙포토]

손주형(구 손용길)학도병의용군회장.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71명의 학도병 중에서 손씨를 포함해 현재까지 두명 생존해 있다. [중앙포토]

포항여중 전투에서 15∼22세의 중학생과 대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 71명 가운데 48명이 전사하고 23명이 부상을 입거나 실종됐다. 학도병 전사자 48명 중에서 10명의 신원만 확인됐다. 이들 전사자는 포항여중 앞에 가매장됐다가 국립현충원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뒤에 놓인 반구 형태의 화강암 속에 합동으로 안치돼 있다. 2002년에는 포항에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을 만들고 신원 확인을 하지 못한 포항여중 전투 참전 학도병들을 찾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 전투에 참전한 학도병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2명뿐이다. 당시 경기중 4학년 학생으로 이 전투에 자진 참전했던 손주형(84·본명 손용길)씨는 “먼저 간 전우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며 “한 달에 한두 번은 포항여중 전투가 꿈에 나와 그때마다 온몸이 흠뻑 젖는다”고 했다. 7일 경기도 봉담읍에서 만난 그는 25평 아파트에서 홀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이들에 대해 아직까지 무공훈장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공적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이유다. 이를 보다 못한 김진형 전 1함대사령관은 “명예로운 학도의용군 무명용사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해달라”는 청원서를 지난 2일 청와대에 냈다. 학도의용군 회장을 맡고 있는 손씨는 “전우들에게 명예를 찾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북한의 침공으로 발생한 한국전쟁으로 국군 13만8000여명이 사망하고 45만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유엔군도 미군 3만6900여 명을 포함해 5만8000여 명이 숨지고 48만여명이 다쳤다.

지난 6일 현충일을 맞았다. 전투는 그쳤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로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돼야 비로소 전쟁도 끝맺을 수 있다. 오는 12일 싱가포르에서 예정된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수용하는 게 갈림길이다. 그렇더라도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명예는 선양돼야 한다. 이들보다 더 고귀한 희생이 어디에 있던가. 2011년 국방부 간부회의에서 당시 이용걸 국방차관의 얘기가 기억난다. “마트에서 아이들과 부모들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떠드는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아야 한다”고.

김민석 군사안보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