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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의혹 교수 나가라”…솜방망이 처벌에 들끓는 캠퍼스

중앙일보

입력

돌아온 포스트잇…대학가 미투 운동은 아직 ‘현재 진행형’

“당신은 누구도 가르칠 자격이 없습니다. 교육자로서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지난 4일 오전 중앙대학교 303관 13층. 학생들이 오가는 교수 연구실 앞에는 형형색색의 ‘포스트잇’ 수백장이 나붙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복도까지 이어진 포스트잇에는 교수를 향한 비난 문구가 담겼다. “중앙의 이름으로 심판하겠다” “학생이 거부한다” 등의 글귀였다. 지난 4월 제자 성폭행 의혹이 제기된 교수가 직접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취지다.

 4일 오전 성폭행 의혹이 제기된 중앙대 K교수 연구실 앞에 붙은 포스트잇과 유인물. 최규진 기자

4일 오전 성폭행 의혹이 제기된 중앙대 K교수 연구실 앞에 붙은 포스트잇과 유인물. 최규진 기자

최근 성폭행 의혹을 받는 교수들을 ‘파면’하라는 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미투운동 이후 가해자로 지목된 교수들의 중징계 처벌을 요구했지만 학교 당국이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는 비판 때문이다. 이들은 징계절차가 학생 의사와 상관없이 불투명하게 진행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날 중앙대 총학생회와 총학생회 산하 성평등위원회는 대학원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학본부는 교내 인권센터의 파면 권고에 따라 권력형 성폭력과 인권침해를 저지른 K교수를 즉각 파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앞서 피해자들의 신고를 받은 중앙대 교내 인권센터는 지난달 대학본부에 K교수를 파면할 것을 권고했다.

중앙대 K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는 포스트잇. 최규진 기자

중앙대 K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는 포스트잇. 최규진 기자

학생들에 따르면 K교수는 지난 2009년부터 제자들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가하고 연구비 횡령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K교수가 2012년 대학원생이던 A씨에게 신체 접촉을 하고, 차 안에서도 강제로 입을 맞추는 등 성추행을 했다고 주장했다. 교수가 ‘내가 너 많이 아끼는 거 알지 않느냐’ ‘왜 너는 나한테 뽀뽀 안 해줘’ 등의 발언을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학교 측이 조만간 인사위원회·징계위원회를 열겠다고 밝혔지만 반발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사립학교법이 규정한 징계시효(5년)를 지난 데다, 실제 징계가 내려질지 불투명하다는 우려 때문이다.

4일 오전 중앙대 대학원 건물 앞에서 총학생회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허정원 기자

4일 오전 중앙대 대학원 건물 앞에서 총학생회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허정원 기자

“솜방망이 처벌은 이제 그만”…성난 학생들

학생들이 직접 비위 교수를 내쫓으려는 움직임은 이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3월 이화여대를 시작으로 연세대·고려대·동덕여대·서울대·성균관대 등 10여개 대학에서도 비슷한 의혹이 제기된 교수들에 대한 집단행동이 거세다. 이들은 대학 당국이 나서서 가해 교수를 엄벌에 처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가장 큰 내홍을 겪고 있는 곳은 서울대다. 이 학교 사회과학대 소속 H교수는 학생에게 성희롱 발언을 했다는 의혹과 함께 제자의 연구비를 황령한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 21일 학교 측은 징계위원회 재심에서도 정직 결정을 유지했지만 학생들은 수위가 가볍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지난 5월 30일 서울대학교 대학본부에서 H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 성지원 기자

지난 5월 30일 서울대학교 대학본부에서 H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 성지원 기자

이날 서울대 총학생회도 대학본부를 찾아 H교수에 대한 중징계 의결을 재차 요구했다. 총학생회 측은 성명문을 통해 “징계위원회의 결정이 끝남에 따라 H교수에 대한 징계 확정은 총장의 수리만을 기다리고 있다”며 “(성낙인 총장은) 징계위원회의 결정을 끝까지 거부하고 H교수에 대한 책임 있는 대응 방안을 모색하라”고 촉구했다.

서울대 총학생회 등이 대학본부와 총장에게 H교수에 대해 파면 등 중징계를 요구하는 글을 쓰고 있다. [서울대 총학생회]

서울대 총학생회 등이 대학본부와 총장에게 H교수에 대해 파면 등 중징계를 요구하는 글을 쓰고 있다. [서울대 총학생회]

학교 당국의 관대한 징계 문제는 사실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학생들은 현행 사립학교법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사학법에 근거한 징계위원회가 동료 교수나 공무원 위주로 꾸려지는 데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교내 인권센터나 양성평등센터 등 피해구제기구가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징계위원회에서 교수에게 파면 등의 중징계가 내려진 경우는 많지 않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국립대에서 총 35명의 교수가 성희롱·성폭행 등 성범죄로 징계를 받았다. 이 중 교수가 파면이나 해임의 징계를 받아 교수직을 상실한 경우는 11명(31.4%)에 불과하다. 나머지 24명은 정직·견책·감봉 등의 경징계 처분을 받는 데 그쳤다.

지난 4년간 국립대에서 총 35명의 교수가 성범죄로 징계를 받았지만 파면·해임으로 교수직을 상실한 경우는 11명에 불과했다. 최규진 기자

지난 4년간 국립대에서 총 35명의 교수가 성범죄로 징계를 받았지만 파면·해임으로 교수직을 상실한 경우는 11명에 불과했다. 최규진 기자

일각에서는 학생들이 징계위에 참여하거나 결정문을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지수 중앙대 성평등위원회 위원장은 “학생들은 학교의 미온적 처벌로 인해 가해자가 다시 공동체에 돌아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한다”며 “사립학교법이라 쓰고 성폭력 가해 교수 보호법이라 불리는 법은 숨겨진 미투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기소 전 이례적 파면까지…무너지는 ‘침묵의 카르텔’ 

전문가들은 미투 운동을 계기로 대학 사회의 폐쇄적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진단한다. 교수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권력형 범죄’ 에 대한 실효성 있는 처벌을 통해 학내 의사결정의 주체를 학생으로 되바꿔야 한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달 30일 성신여대는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이례적으로 성폭력·가학행위 의혹을 받는 교수를 파면 조치했다.

30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신여대에서 학생들이 성폭행 의혹 교수의 파면을 요구하고 있다.[연합뉴스]

30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신여대에서 학생들이 성폭행 의혹 교수의 파면을 요구하고 있다.[연합뉴스]

장미혜 여성정책연구원 실장은 “과거에는 학내에서 여론이 있어도 아무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합당한 처벌이 본보기가 퍼지면 이러한 수직적 구조도 뒤바뀔 것”이라며 “대학가 미투의 가장 큰 사회적 의미는 학생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연대감을 확장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김영순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미투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요구들이 나왔지만 대학처럼 법제도가 피해자를 보호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며 “피해자 당사자이자 주체인 학생들까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싸우고 있단 걸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최규진·허정원·성지원 기자 choi.kyujin@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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