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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이국종이 꿈꾸던 닥터헬기…"긴급" 인천서 서산까지 23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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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의 현장 돋보기] 닥터헬기 타보니

[논설위원이 간다] '날아다니는 응급실' 닥터헬기, 위급환자 6150명 구했다  

위급환자에겐 시간이 생명이다. 뇌·심혈관이나 중증외상 환자는 한 시간이 생사를 가르는 '골든아워(Golden Hour)'다. 중증외상센터 창시자인 미국 애덤스 카울리(1917~91) 박사가 정립한 개념이다. 생명을 구하려면 신속한 응급조치와 이송이 필수다. 그 역할을 하는 천사가 있다. 첨단 의료장비와 의료진을 갖춘 '날아다니는 응급실' 닥터헬기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늦은 2011년 닥터헬기를 도입했다. 미국의 에어 앰뷸런스(72년), 일본의 닥터헬리(2001년)보다 한참 늦었다. 만시지탄이지만 활약은 눈부시다. 전국에서 6대가 7년간 6591번을 날아 6150명을 실어날랐다. 닥터헬기에 동승해 긴박한 생명 구조의 현장을 취재했다.

SOS 전화 받자 5분 만에 번개 출동 #인천→서산 23분, 60대 뇌 손상 막아 #첨단 장비·약품 갖추고 의료진 동승 #7년간 6591번, 2~3일에 한 번 날아 #전국 6대뿐…미국 1000대, 일본 50대 #헬기 늘리고 외상센터와 연계 강화를

가천대 길병원 닥터헬기 항공의료팀이 5월 31일 충남 서산에서 작업 중 유독가스를 들이마셔 호흡곤란으로 뇌 손상 우려가 있던 응급 환자를 인천 길병원 응급센터로 이송하고 있다. 오른쪽이 양혁준 응급센터장, 왼쪽 두번째가 김효선 간호사. 최정동 기자

가천대 길병원 닥터헬기 항공의료팀이 5월 31일 충남 서산에서 작업 중 유독가스를 들이마셔 호흡곤란으로 뇌 손상 우려가 있던 응급 환자를 인천 길병원 응급센터로 이송하고 있다. 오른쪽이 양혁준 응급센터장, 왼쪽 두번째가 김효선 간호사. 최정동 기자

 닥터헬기를 타는 건 쉽지 않았다. 국립중앙의료원과 인천시에 열흘 전에 취재 요청 공문을 보내 허락을 받아야 했다. 지난달 31일 오전 8시 40분. 인천시 남동구 가천대 길병원 응급의료센터 1층에 있는 닥터헬기 운항통제실로 들어섰다. 양혁준 응급센터장(응급의학과 교수) 겸 한국항공의료협회장과 김형주 닥터헬기 코디네이터, 김혜현 운항관리사, 김효선 간호사가 일을 시작한 지 서너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일출 직전인 새벽 4시 40분에 출근했다는 김 운항관리사는 "해가 뜨면 항공의료팀과 닥터헬기가 즉시 출동 대기에 들어간다"며 "오늘 기상은 양호하다"고 말했다.

 기자도 긴장하며 함께 대기했다. 탑승 서약서에 사인도 했다. 낮 12시. 점심시간인데도 모두 자리를 지켰다. 의문이 풀렸다. 도시락이 배달됐다. "늘 이렇게 해결해요. 1분 1초도 늦으면 안 되는 데 외식은 사치죠." 환자 정보와 헬기 이송 메신저 역할을 담당하는 김 코디네이터(응급구조사)의 말이다.

 오후 2시 21분. 전화벨이 울렸다. "긴급 환자 발생. 서산으로 빨리 와주세요." 순간, 항공의료팀 책상 위에 있는 경광등이 번쩍였다. 비상 신호였다. 서산에서 60대 남성이 작업 중 유독가스를 흡입해 위험한 상태라는 SOS였다. 닥터헬기가 도입된 2011년부터 7년째 200번 넘게 헬기를 탄 베테랑인 양 센터장은 “뇌 손상이 올 수도 있다”며 출동을 지시했다. 항공의료팀은 즉시 인근 군부대 계류장에서 대기 중인 닥터헬기에 출동을 요청했다.

 오후 2시 22분. 양 센터장과 김 간호사가 제세동기 모니터와 응급약물 키트를 챙겼다. 기자는 이들과 함께 21층 헬리패드로 올라갔다. 헬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바람과 굉음이 심했다. 30년 전 군 헬기를 타 본 적은 있지만 떨렸다. 헬기에 타 X자 형태의 안전벨트를 매는데 자꾸 엉켰다. 안전체크를 하던 부기장이 대신 매줬다. 헤드셋을 끼니 소음을 견딜만했다.

양혁준 응급센터장과 김효선 간호사가 닥터헬기에서 환자에게 수액 등 약물치료를 하고 있다. 양영유 기자

양혁준 응급센터장과 김효선 간호사가 닥터헬기에서 환자에게 수액 등 약물치료를 하고 있다. 양영유 기자

 오후 2시 25분. "이륙하겠다"는 기장의 어나운스와 동시에 헬기가 떠올랐다. 온몸으로 진동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송도 앞바다를 지났다. 중형 승용차를 탄 것처럼 승차감이 좋았다. 닥터헬기는 말 그대로 '날아다니는 응급실'이었다. 중앙에는 환자용 간이침대가 놓여 있고, 인공호흡기와 자동흉부압박장비, 흉강삽관장비, 초음파 진단기, 심근 효소 측정기 등 각종 첨단 장비가 있었다. 양 센터장은 "정맥제·승압제·지혈제 등 30여 종의 약물도 갖췄다"며 "환자 상황에 따라 응급시스템을 탄력적으로 가동한다"고 설명했다. 최고 시속 250㎞로 연속 870㎞ 운항이 가능한 이 헬기는 기장과 부기장을 포함해 8인승이다. 화성 앞바다와 당진을 거쳐 서산 상공을 날 때는 시속 234㎞를 찍었다. 떨림도 거의 없었다. 50번 넘게 헬기를 탄 김 간호사는 "도착하자마자 환자의 심폐기능을 안정시키는 게 급선무"라고 했다.

인천 가천대 길병원에서 충남 서산 종합운동장까지의 닥터헬기 비행 궤적이 표시된 스타트랙. 2분 간격으로 이동 지점과 운항 속도가 찍힌다. 최정동 기자

인천 가천대 길병원에서 충남 서산 종합운동장까지의 닥터헬기 비행 궤적이 표시된 스타트랙. 2분 간격으로 이동 지점과 운항 속도가 찍힌다. 최정동 기자

 오후 2시 48분. 이륙 23분 만에 직선거리로 76㎞인 서산종합운동장(환자 인계지점) 트랙에 내려앉았다. 환자는 구급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의식이 없었다. 의료진은 신속히 움직였다. 심전도 모니터를 부착하고 산소포화도를 측정한 뒤 산소와 약물을 투여했다. 혈압·호흡·맥박 등 바이털 사인도 체크했다. 그리고 헬기로 옮겼다.

 오후 2시 57분. 이륙했다. 양 센터장과 김 간호사는 프로다웠다. 수액을 놓으며 혈액·가스검사를 병행했다. 5분 뒤 모내기가 한창인 당진 들판을 지날 때 환자가 입을 열었다. "어지럽다"고 했다. 양 센터장은 "유독가스를 들이마셔 어지럼증과 호흡곤란이 겹쳐 있다"고 말했다. 푸른 바다 위로 시화방조제가 보였다. 병원이 멀지 않았다. 안도가 됐다. 양 센터장은 운항통제실에 환자 상태를 알려주며 만반의 준비를 당부했다.

길병원 항공의료팀 김효선 간호사가 닥터헬기를 탈 때 늘 챙기는 응급약물 키트. 양영유 기자

길병원 항공의료팀 김효선 간호사가 닥터헬기를 탈 때 늘 챙기는 응급약물 키트. 양영유 기자

 오후 3시 21분. 헬기는 다시 길병원 헬리패드에 내려앉았다. 대기하던 의료진이 민첩하게 환자를 1층 응급센터로 옮겼다. 왕복 47분간의 마침표였다. 환자는 61세 김모씨. 의료진이 신속히 산소를 공급하고 약물치료를 하자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김씨는 "고맙다"고 했다. 자칫 급성호흡 곤란에 따른 뇌 손상이 발생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오후 3시 30분. 운항통제실에 들르니 김 운항관리사가 비행 궤적을 보여준다. 비행 속도와 위치, 거리가 2분 간격으로 찍힌 스카이트랙(skytrac)이다. 김 관리사는 "백령도 등 서해 도서지역과 김포·검단지역을 커버하는 길병원 닥터헬기는 오늘까지 988번을 날아 961명을 이송했다"고 말했다.

 닥터헬기는 중증환자에게는 한 줄기 빛이다. 우리나라는 2011년 9월 길병원과 목포한국병원을 시작으로 2013년 원주세브란스병원과 경북 안동병원, 2016년 충남 단국대병원과 전북 원광대병원 등 여섯 곳에 배치됐다.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이국종 교수가 일하는 아주대 병원도 연내 일곱 번째로 도입한다. 한국병원과 길병원 헬기는 중형으로 연간 운영비는 40억원, 나머지는 소형으로 30억 원 정도다. 보건복지부가 운영비의 70%, 해당 지자체가 30%를 대며 병원은 의료진을 지원한다. 환자는 이송비가 무료이고 치료비만 부담한다. 의료팀은 전문의·간호사·응급구조사 등 18명이 연중무휴로 근무한다. 닥터헬기는 조종사·정비사·운항관리사·급유차 기사 등 10명이 팀을 이룬다.

 국립중앙의료원에 따르면 닥터헬기는 2011년 76명을 시작으로 올 5월까지 총 6150명을 실어날랐다. 경북 1667명, 전남 1441명, 강원 1045명 등이다. 중증외상과 뇌·심혈관 환자가 절대적이다. 의료계는 전체 이송환자의 90% 이상이 생명을 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날씨가 궂거나 일몰 후에는 날개가 묶인다. 인구 대비 헬기 수도 절대 부족하다. 미국은 1000 대, 일본은 50대가 넘는다. 외상 사망률도 미국·일본의 10~15%보다 배 이상 높은 30.5%나 된다. 복지부는 2025년까지 이를 20%로 낮추겠다는 계획이다. 권역별 도로망을 고려한 이송지도(trauma map)를 만들고, 야간 비행도 아주대병원 닥터헬기 등 일부에 허용을 검토 중이다.

의료진이 서산에서 인천으로 긴급 이용한 환자를 권역응급의료센터에서 치료하는 모습. 최정동 기자

의료진이 서산에서 인천으로 긴급 이용한 환자를 권역응급의료센터에서 치료하는 모습. 최정동 기자

 양 센터장은 "6대뿐인 닥터헬기와 500여 곳인 환자 인계지점을 배 이상으로 확충하는 동시에 권역응급의료센터 40곳, 외상센터 17곳과의 연계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래야 촌각을 다투는 환자 이송 사각지대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닥터헬기에 동승해 시간이 생명이란 걸 실감한 기자도 같은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