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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구속 벗겠다” 탈코르셋 운동 … 상의 탈의 시위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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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페이스북코리아 앞에서 상의 탈의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은 ’페이스북은 여성의 나체 사진은 음란물로 규정해 삭제하면서 남성의 나체 사진은 삭제하지 않는다. 이런 차별은 없어져야 한다“며 ’남성의 나체를 허용하는 것처럼 여성의 나체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페이스북코리아 앞에서 상의 탈의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은 ’페이스북은 여성의 나체 사진은 음란물로 규정해 삭제하면서 남성의 나체 사진은 삭제하지 않는다. 이런 차별은 없어져야 한다“며 ’남성의 나체를 허용하는 것처럼 여성의 나체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2일 서울 역삼동 페이스북코리아 사옥 앞에서 여성 10명이 상의를 탈의한 채 시위를 벌였다. 그들의 몸에는 ‘내 몸은 음란물이 아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페이스북 등 온라인에 여성의 나체 사진을 자유롭게 게시할 권리를 주장하며 ‘누드 시위’를 하는 현장이었다.

주말 역삼동 집회로 본 여성운동

몇몇 참가자들은 ‘여자가 더우면 웃통 좀 깔 수 있지’ ‘브라 없는 맨가슴을 꿈꾼다’ ‘현대판 코르셋 내 몸을 해방하라’ 등의 글귀가 쓰인 피켓을 들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황급히 여성들의 몸을 이불로 가렸다. 여성들은 “우리의 몸은 가려야 할 음란물이 아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탈의를 제지하는 경찰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누드 시위의 발단은 지난달 29일 페이스북 측이 이들의 반라 사진을 삭제한 데서 시작됐다. 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6일 ‘월경 페스티벌’ 행사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오자 페이스북은 ‘나체 이미지 또는 성적 행위에 관한 페이스북 규정을 위반했다’며 사진을 삭제했다. 이 단체에 1개월 계정 정지 처분을 내렸다.

긴 머리 자르고 화장 지운 인증샷 

하지만 이날 항의 시위로 논란이 커지자 페이스북코리아 측은 3일 삭제한 사진을 복원하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 페이스북 측은 “페이스북 커뮤니티 규정을 위반하지 않은 귀하의 게시물이 당사의 오류로 삭제됐다. 해당 콘텐츠를 복원하고 관련 계정에 적용됐던 차단을 해제했다”고 설명했다.

불꽃페미액션은 이번 시위의 취지에 대해 “여성 나체는 음란물로 규정하면서 남성 나체 사진은 삭제하지 않는 것은 차별”이라며 “페이스북은 이전에도 여성의 신체가 노출됐다는 이유로 퓰리처상을 받은 ‘네이팜탄 소녀’ 사진이나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의 작품 ‘세상의 기원’을 촬영한 사진도 수차례 삭제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나체 사진만을 음란물로 분류하는 건 전형적인 성적대상화이자 여성혐오라는 주장이다.

“내 몸은 가려야 할 음란물 아니다” 

여성들이 SNS에 올린 탈코르셋 인증샷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여성들이 SNS에 올린 탈코르셋 인증샷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시위를 지켜본 시민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50대 남성 김문수(51)씨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사회 통념상 거부감이 들고 방법이 지나친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생 주모(22)씨는 “여성의 가슴이 태어날 때부터 성적인 의미를 부여받는 건 아니다. 남성의 상반신 노출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여성의 노출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지워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사회가 원하는 ‘여성’의 모습을 거부하는 여성들의 ‘탈코르셋’ 운동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탈코르셋은 말 그대로 ‘코르셋’에서 탈피하겠다는 의미다. 늘 해 오던 화장을 지우고 렌즈 대신 안경을 쓴다. 잘 길러 온 머리를 제멋대로 자르고 편한 속옷을 입는다. 중세시대부터 여성들이 잘록한 허리라인을 만들기 위해 착용한 코르셋같이 사회가 원하는 ‘예쁜 모습’을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5년 차 직장인 김은영(30)씨는 한 달 전부터 출근 전 매일 선크림 정도만 바르고 회사에 가기 시작했다. 화장이라는 ‘꾸밈 노동’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는 것이 김씨가 선택한 탈코르셋이었다. 김씨는 “‘좀 아파 보인다’는 말은 들었지만 지적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적었고 출근 준비 시간이 줄어 삶은 더 윤택해졌다”며 “그동안 나 자신을 스스로 만든 틀 안에 가둬 놓았던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인스타그램·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연일 탈코르셋을 해시태그(#)로 단 ‘인증샷’들이 올라오고 있다. 일부러 부러뜨린 립스틱, 바닥에 흐트러진 머리칼 사진 등 다양하다. 주로 10대, 20대 여성들이다.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탈코르셋 인증을 한 여성들에게 ‘왜 탈코르셋을 하게 됐는지’를 묻는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이 왔다.

페이스북, 나체 사진 복원하고 사과 

탈코르셋을 주제로 한 웹툰.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탈코르셋을 주제로 한 웹툰.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한때 잠을 줄여 가며 치렁치렁 기른 머리카락을 감고 말리고 고데기로 보기 좋게 스타일을 손봤으며, 머리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화장을 했습니다. 밖에서도 화장이 번지거나 들뜨진 않았는지 늘 확인했죠. 고작 예쁘기 위해서요. 그때는 자기만족이라 생각했던 꾸밈이 제 자유를 빼앗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누군가 더 일찍 제게 ‘예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 줬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여자들에게 (탈코르셋한) 절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숏커트한 사진을 올린 20대 초반 대학생 A씨)

“그냥 화장을 굳이 해야 되나 싶고, 남성은 그만큼 안 꾸미는데 나도 꾸미고 다녀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해 탈코르셋을 하게 됐습니다.”(부순 화장품 사진을 올린 20대 여성 B씨)

“(코르셋은) 쟤가 해서 나도 하고, 내가 해서 남도 했겠다 싶더라고요.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요. 렌즈에 눈이 충혈되는 일, 브래지어에 숨이 막히고 땀이 차는 일, 피곤한 몸으로 화장을 지우는 일, 구두에 발이 상하는 일 등은 본인이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닐 테니까요.”(부러진 립스틱 사진을 올린 고등학생 C양)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과거 여성들은 힘을 갖기 위해 문화나 제도를 바꾸기보다 ‘사회가 원하는 모습’대로 맞춰 살아가는 데 집중했고 소비시장에서도 여성들에게 ‘섹시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탈락한다’ ‘예쁘지 않으면 지는 거다’ 식의 인식을 주입해 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러다 보니 사회 곳곳에서는 성희롱 등 권력자들의 폭력이 계속됐고 최근 이어진 미투 운동은 여성들에게 ‘나 왜 이렇게 살아 왔지?’ 자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고 진단했다.

“취지 이해하지만 지나쳐” 반응도 

미국에서는 탈코르셋 운동이 1960년대부터 있었다. 1968년 9월 미국 애틀랜틱시티에서 미스 아메리카 대회가 열렸을 때다. 대회장 밖에서는 이 대회에 반대하는 200여 명의 여성이 ‘자유의 쓰레기통’(Freedom Trash Can)이라고 이름 붙인 쓰레기통에 치마와 속옷, 가짜 속눈썹 등을 버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탈코르셋은 여성들의 자기성찰적 운동이다. 이들이 코르셋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사회가 논쟁을 벌이며 의식을 넓혀 가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분석했다.

홍상지·최규진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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