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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암기보다 시끄러운 선거 유세방송… 도 넘은 지방 선거 소음

중앙일보

입력

"비명 지르는 줄 알았다"…외국인도 놀란 확성기 소음

“누군가 불합리한 일을 당해 비명을 지르는 줄 알았어요.”

지난달 31일 오후 6시 20분 서울 강남역 11번 출구 앞 M스테이지. 6·13 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 첫날에 만난 영국인 앤디 로너건(32)씨는 주변 소리에 놀라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행하던 친구 김태호(33)씨에게 듣고서야 이 소리가 선거운동 연설임을 알았다. 이날 이곳에선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더불어민주당 박원순, 자유한국당 김문수 후보의 유세가 이뤄졌다. 로너건씨는 “영국에선 선거기간 확성기와 퍼레이드식 유세활동이 금지돼 있다”며 “일부 유럽에 남아있지만 한국은 더 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오늘도 아침부터 돌아다니는 유세차량 때문에 잠을 깼다”며 “선거 때마다 악을 쓰며 소음을 내는 게 누굴 위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6·13 지방선거가 임박함에 따라 후보 간 유세전도 치열해지고 있다. 그에 따라 시민들의 ‘짜증’도 커지고 있다. 선거 때마다 확성기에서 나오는 선거 소음 때문이다.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강남역 11번 출구 M스테이지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와 정순균 강남구청장 후보의 선거유세가 이뤄지고 있는 모습. 소음측정기로 재 본 순간 최고 소음은 112.9dB였다. [김현수 대구일보 기자]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강남역 11번 출구 M스테이지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와 정순균 강남구청장 후보의 선거유세가 이뤄지고 있는 모습. 소음측정기로 재 본 순간 최고 소음은 112.9dB였다. [김현수 대구일보 기자]

소음측정기로 재 보니…'난청 유발 수준' 

실제로 지난달 31일 취재진이 서울과 울산·부산·광주 지역에서 살펴본 선거 유세 소음은 심각했다. 서울 강남역에선 선거 노래와 연설이 확성기에서 나오자 많은 시민이 귀를 막은 채 자리를 떠났다. 기자가 유세 차량에서 약 50m 떨어져 소음측정기로 약 5분간 재 본 소음 크기는 90~110㏈였다. 순간 최고 소음은 112.9㏈였다. 환경부가 발표한 ‘소음 정도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90㏈은 소음이 심한 공장 내부 소리, 100dB은 바위를 뚫는 착암기 소리다. 모두 난청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다. 서윤희(여·30)씨는 “7시에 이곳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귀가 아파 약속 장소를 바꿨다”며 "정치 혁신 등 말만 거창하게 늘어놓는데 후보 선거방식은 발전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오전 울산광역시 남구 공업탑로터리에서 열린 울산시장 후보들이 선거유세를 벌이고 있다. [울산=최은경 기자]

지난달 31일 오전 울산광역시 남구 공업탑로터리에서 열린 울산시장 후보들이 선거유세를 벌이고 있다. [울산=최은경 기자]

다른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날 오전 7시 울산광역시 남구 공업탑로터리에선 여야의 시장 후보 선거운동원들이 출근길 유세를 벌였다. 소음측정기로 오전 7시 50분부터 5분간 측정한 결과 평균 소음 86.3㏈, 최고 순간 소음 94.9㏈이 나왔다. 남구 신정시장 동문 앞 4차선 도로 인근에서 만난 안경점 사장 권모(50)씨는 “유세 차량이 오면 손님 말이 잘 들리지 않아 영업할 수 없다”며 “정도를 넘은 유세 소음은 제한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서면로터리에서도 후보들이 동시에 선거 유세를 펼치자 대혼란이 벌어졌다. 이 지역 건물 관리소장 이모(62)씨는 “선거운동원들이 도로까지 내려오자 버스기사가 버스에서 내려 고함을 치는 등 난리가 났다”며 “소음이 너무 심해 평소 열어두던 관리사무실 문을 닫았는데도 시끄럽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 풍금사거리에서도 오전 7시가 지나자 여러 차량에서 나오는 선거 노래와 후보자의 마이크 유세 소음이 고막을 따갑게 했다. 순간 최대 소음이 90㏈를 웃돌았다.

교통 불편도 다반사…역주행까지

도로를 점거한 유세 차량도 시민 불편을 키웠다. 이날 밤 서울 강남역 사거리 일대는 교통이 마비됐다. 선거운동이 끝난 뒤 유세 차량이 경찰 통제를 받으며 차로 방향과 정반대로 움직여 유세장소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이날 유세를 한 박원순·김문수 후보 측은 “차로 방향을 고려하지 않고 대형 TV 화면을 왼쪽에 설치해 부득이하게 역주행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시민 박세윤(36)씨는 “유세현장의 교통체계는 미리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밤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서 서울시장 박원순 후보 측 유세차량이 유세장소를 역주행해 빠져나오면서 주변 도로 교통이 통제되고 있다. [김현수 대구일보 기자]

지난달 31일 밤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서 서울시장 박원순 후보 측 유세차량이 유세장소를 역주행해 빠져나오면서 주변 도로 교통이 통제되고 있다. [김현수 대구일보 기자]

같은 날 오전 광주 서구 금호동 풍금사거리에서도 출근 시간에 각 후보자의 유세차량 4대가 편도 3·4차선 모퉁이마다 자리를 잡아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 횡단보도를 침범해 불법 주정차된 유세차량으로 인해 우회전하는 차량은 유세차량을 피해 모퉁이를 돌았다. 보행자들도 모퉁이에 불법 주·정차된 유세차량이 횡단보도를 가리면서 위험에 노출됐다. 등교하던 고등학생 윤소연(17)양은 “선거 때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선거소음 규제 없어…교통단속 꺼리는 지자체·경찰

문제는 후보들의 이런 행위를 규제할 방안이 현재로썬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후보들의 확성기 소음 크기(㏈)를 규제하는 내용이 공직선거법에 없다. 휴대용 확성장치는 오전 6시~오후 11시까지, 녹음기 또는 녹화기는 오전 7시~오후 9시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규정만 있다. 집회·시위법 적용도 받지 않는다. 집시법에선 주간 75㏈을 초과하면 확성기 사용중지 명령 등을 내릴 수 있지만 유세차량은 규제 대상이 아니다. 민원, 신고를 접수해도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이 할 수 있는 건 후보 측에 사용 자제를 당부하는 정도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선거 때마다 확성기 소음 민원이 제기돼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면서도 “소음 크기를 제한하는 건 측정 방법에 따라 결과가 달라 기준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반면 유세차량의 불법 주·정차는 단속대상이다. 공직선거법이 아닌 도로교통법 위반 사항이기 때문이다. 단속 권한은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에 있다. 하지만 지자체 공무원은 며칠 뒤면 당선될지도 모르는 구의원, 구청장, 국회의원 후보자에 대해 단속을 꺼린다. 선거운동 기간이 길지 않은 데다가 자칫 공직선거법상 보장된 후보자의 선거운동 권리나 유권자의 알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다는 점도 고려한다. 경찰 관계자는 “유세 차량의 도로 점용은 불법이지만 현장 경찰관들이 ‘선거운동 기간에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단속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윤창근 성남시의원 후보는 소음없는 선거를 위해 선거기간 친환경 전동자전거를 이동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윤창근 후보]

윤창근 성남시의원 후보는 소음없는 선거를 위해 선거기간 친환경 전동자전거를 이동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윤창근 후보]

이처럼 시민 불편이 커지자 ‘소음 없는 선거’를 하겠다는 후보도 나오고 있다. 서원경 바른미래당 인천 연수구청장 후보는 ‘소음 없는 선거’를 표방하며 유세차량 없는 뚜벅이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다. 경기 성남시의원 나선거구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윤창근 후보도 친환경 전동자전거를 유세 차량으로 선택해 소음을 줄이기로 했다.

전문가 “구태의연한 유세 방식 바꿔야”

전문가들은 유세 방식을 시대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치권에선 확성기 없인 정치신인을 알릴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정치문화가 정보통신기술 발달 등 시대 변화를 좇아가지 못한 것”이라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TV토론 등을 활성화해 시민 접촉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꼭 대중 유세가 필요하다면 횟수·시간대 제한 등을 통해 시민 불편을 줄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성남·울산·부산·광주=이승호·최모란·최은경·이은지·김호 기자, 김현수 대구일보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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