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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서비차’ 물류혁명 중 … 휴대전화 주문, 어디든 배송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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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호 17면

2011년 말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이용자 470만 명에 육박한 무선통신과 북한 전역을 커버하는 프라이빗 운송 서비스인 ‘서비차(servi-cha·서비스와 차의 합성어)’가 결합하면서 북한에서 물류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과거 직접 물건을 싸들고 장마당(북한식 시장)을 전전하던 ‘보따리상(runner merchant)’이 사라지고 이제는 돈만 내면 앉아서 물건을 받을 수 있는 택배 서비스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런 물류혁명의 한복판엔 휴대전화와 버스, 화물차, 미니 밴 등 차량을 보유한 ‘서비차’의 활약이 있다.

한미연구소 ‘김정은 시대 운송’ 논문 #휴대전화 사용자 470만명으로 확대 #보따리상 사라지고 택배 서비스 붐 #화물차·군용차·밴 등 뛰어들어 #배송 정보 제공 등 서비스 경쟁에 #서비차로 화물뿐 아니라 돈도 오가 #검문소 통과 땐 뇌물 제공 ‘숙제’도

존스홉킨스대 산하 한미연구소(USKI)가 2012~16년 탈북한 19명에 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낸 ‘김정은 시대 북한의 무선통신과 프라이빗 운송서비스’ 논문을 통해 북한발 물류혁명의 실상을 소개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불비(不備)해 불편하고 참으로 민망하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북한 철도는 운송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대신 1990년대 중반부터 도로를 이용한 서비차가 본격화했다. 일반인들은 보통 국가기관에 자동차 등록비와는 별도로 뇌물을 주고 서비차 운행을 할 수 있는 번호판을 받는다. 일부 관영기업과 군부대는 아예 자신들의 차량을 일반인에게 서비차로 빌려줘 돈벌이를 하기도 한다. 한 탈북자는 “자유를 살 돈이 있는 사람에게 북한은 자유를 보장한다”고 말했다.

“주민들 목적지별 정가 운송비 잘 알아”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북한의 서비차는 화물차·군용차·버스·밴·오토바이·택시 등 다양하다. 특히 2010년대 들어선 북한 내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버스 서비차가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사람과 화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어서다. 또 같은 기간 5~10t 중국 둥펑트럭이 대거 밀수됐으며 최근엔 운송 규모가 커지면서 20t 트럭을 선호한다고 한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20t 둥펑트럭 신차는 4만5000달러, 10만㎞ 정도 운행한 중고차는 3만5000달러 정도에 살 수 있다.

한 탈북자는 “적어도 2014년 이후엔 서비차 운행에 대한 단속이 없었다”며 “2014년에 ㎏당 약 5위안이었던 기름값이 2018년 1월경 15위안까지 뛰었는데도 운송료를 올리지 못할 정도로 서비차가 북한 전역에 넘쳐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로 인해 운송비가 사실상 정가제가 됐다. 2015년 탈북한 한 서비차 운영자는 "웬만한 북한 사람들은 목적지별 운송비를 잘 알고 있다. 가격이 정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양강도 혜산 지역의 경우 미니밴 화물 운송료는 운송 거리에 따른다. 평양 300달러, 원산 150달러, 함흥 120달러 하는 식이다.<표 참조>

2002년 11월 첫 도입된 북한 무선통신 시장은 현재 이용자 수가 470만 명 규모로 커졌다. 원래 휴대전화는 당·정·군 고위관리 또는 뇌물을 줄 수 있는 ‘돈주’(돈을 많이 번 상인)들만 개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정은 시대 들어 규제가 대폭 완화되면서 신분 조회 과정에서 특별한 하자가 없고 돈만 있으면 누구나 휴대전화를 개통할 수 있게 됐다. 현재 무선통신망은 북한 전역의 14%를 커버하는 데 불과하지만 이 지역에 북한 전체 인구의 94%가 살고 있다.

휴대전화 보급 증가는 서비차 운행의 획기적인 변화를 주도했다. 화주는 더 이상 장마당에서 서비차를 찾을 필요가 없다. 휴대전화로 서비차를 섭외하면 된다. 중간에 ‘구간장’이라고 부르는 브로커가 돕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평양에서 함흥으로 서비차를 운행할 경우 평양 브로커가 함흥 브로커에게 연락해 함흥에서 평양으로 되돌아올 때 실을 화물을 찾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북, 연료 수요 늘며 대북제재에 취약”

휴대전화 덕분에 북한 전역의 장마당 물가는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그 결과 서비차는 물건을 비싸게 팔 수 있는 장마당으로 곧바로 물건을 보낼 수 있게 됐다. 2015년 탈북한 한 서비차 이용자는 “예전엔 파는 사람이 자신이 팔 물건을 가지고 장마당을 찾아갔다. 이제는 (장마당으로) 물건을 ‘쏜다’(‘보낸다’의 북한식 표현). 물건을 보내는 사람, 배달하는 사람, 받는 사람이 모두 다르다. 파는 사람은 이제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정확한 배송이 서비차 비즈니스의 생명이 됐다. 수시로 화주와 받는 사람에게 배송상황을 알려준다. 비싼 화물을 운송할 때는 서비차 안에 여유 공간이 있더라도 일부러 승객을 태우지 않거나 추가로 화물을 싣지 않기도 한다. 정확한 배송을 통해 VIP 화주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비차를 통해 돈이 오가기도 한다. 예전 북한에서는 ‘돈을 빌려준 사람이나 빌린 돈을 갚은 사람은 멍청이’라는 우스개가 있었지만 이것도 옛말이 됐다고 한다. 신용이 비즈니스의 생명인 자본주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배송을 위해 서비차는 북한 전역에 있는 검문소를 통과할 때마다 ‘숙제’, 즉 뇌물 상납을 해야 한다. 정기적인 상납은 필수고 그때그때 검문소 요원이 요구하는 대로 모두 들어줘야 한다. 2015년 한국에 온 한 탈북자는 “검문소 경비요원들은 적재량을 초과했거나 승객을 너무 많이 태웠거나 불법 화물을 실었을 때 차를 세우라고 명령한다. 이때 뇌물을 바로 줘야 한다. 뇌물을 주면 대개 1년은 뒤를 봐준다”고 설명했다.

연료 공급책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거엔 서비차가 차 안에 여분의 기름을 싣고 다녔지만 최근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운송 도중 휴대전화로 약속한 곳에서 만나 사면 되기 때문이다. 2014년 탈북한 한 연료 상인은 “과거엔 군부대에서 빼돌린 연료를 우리 집 헛간에 보관했다. 하지만 요즘엔 휴대전화로 통화해 보안요원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한적한 곳에서 운전자를 만나 바로 판매한다”고 말했다.

이번 논문을 쓴 김연호 USKI 선임 연구원은 이와 관련, “서비차 운영으로 연료수요가 점점 늘어나면서 북한이 대북 석유 제재에 더욱 취약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분석했다.

차세현 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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