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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많이 쓴다고 '한글 외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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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7일 LG전자 창원1공장에서 남아공 출신인 '잉글리시 버디(원어민 도우미)' 니타가 최혁재 조직문화그룹 과장과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두 사람은 최 과장의 최근 미국 출장 건을 화제로 삼았다. 잉글리시 버디는 원어민이 불시에 사무실을 방문. 20~30분간 영어로 대화를 하는 제도다. 1월 초 도입될 때만 해도 '회의 간다' '커피 마신다'며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송봉근 기자

경남 창원에 있는 LG전자 DA(생활가전)사업본부 특허그룹의 박일권 책임연구원. 그는 지난주 영국인 변호사 윌리엄 니오바드와 전화통화를 했다. 6월 중 방한 일정을 협의하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주로 글로 협의했는데 요즘엔 3분의 1쯤은 직접 대화한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해 10분간 원어민과 영어로 전화를 한다. MP3파일 형태의 영어강의도 듣는다. 최근엔 1주짜리 발표 영어 강좌도 들었다. 오전 팀회의는 영어로 한다. 그는 "우리말이 튀어나올 경우 벌금 1000원을 내도록 한 팀도 있다"고 소개했다. '잉글리시 버디(영어 친구)'란 명찰을 단 원어민이 불쑥 사무실로 찾아와 말을 거는 일도 있다.

LG전자는 2008년 지식.자료.기술 등 정보를 영어로 공유하는 목표를 세웠다. 박 연구원의 노력도 그 일환이다. LG관계자는 "LG전자는 매출의 80%가 해외에서 나오는 글로벌 기업"이라며 "전 세계에서 경쟁하려면 한국 사람을 포함, 전 세계 사람을 활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영어가 필수"라고 말했다.

영어 강국이 되기 위해선 한 분야만의 노력으로는 부족하다. 사회 전체에 영어를 사용하는 분위기가 퍼져야 한다. 정부의 뒷받침도 필요하다. '영어 사용의 확대'를 곧 '우리말의 포기'로 받아들이는 인식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 말하기 능력 중시해야=지난해에만 171만여 명이 토익(TOEIC)시험을 봤다. 전년보다 2만5000여 명 늘어난 규모다. 성균관대.한양대 등 87개 대학이 입시에서 토익을 보고 기업 1000여 곳이 채용.승진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LG전자 DA사업본부는 2004년 듣기와 독해로만 이뤄진 토익을 말하기 시험(SEPT)으로 대체했다. 진급 때 반영하는 것도 SEPT로 바꾸었다. DA사업본부 관계자는 "토익이 800~900점대라면 SEPT는 7, 8(10이 최고)이 나와야 하는데 3, 4밖에 나오지 않는 등 토익과 말하기 능력은 상관성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조은상 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국내 영어평가 시장이 비용 대비 효과가 매우 떨어지는 건 영어평가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토익의 한계와 문제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 영어 거부감부터 없애야=중국 선전시는 2004년부터 '100만 시민 영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시정부 공무원에서 택시 운전기사까지 간단한 영어서비스가 가능토록 하는 게 목표다. 선전시 뤄후(羅湖)구 사무소에선 점심시간 직전 5분간 영어회화 방송을 튼다. 난산(南山)구는 자체적으로 '도시행정 관련 생활영어'를 편찬,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역시 영어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다.

2003년 10월 이명박 서울시장은 "서울시 공식 문서라든지 국장급 이상 회의에서 영어를 한글과 같이 쓸 것"이라며 "서울시가 동북아 거점도시가 되려 하는데 국민이 영어를 할 줄 모르면 안 된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시는 '영어상용화 추진위'를 구성, 공무원뿐 아니라 서울시민의 영어능력도 키운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작 추진위가 만들어진 적은 없다. 서울시 관계자는 "한글을 두고 왜 영어를 쓰려 하느냐는 반발이 있었고, 그 때문에 다른 부처와의 협의도 잘 안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양대 김임득 교육대학원장은 "경제특구.공공기관 등에선 영어를 병행 사용할 필요가 있다"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세대가 (국제경쟁을)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 정부 차원 시스템 있어야=유럽연합(EU) 집행부는 2000년 개인의 언어능력과 학습경험이 담긴 '유럽어 포트폴리오(ELP)'란 제도의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영어 등 14개 유럽어에 대한 듣기.읽기.쓰기.구조(문법).어휘 등 분야별 자가 진단이 가능한 사이트(www.dialang.org)의 구축도 지원했다. 초.중.고생뿐만 아니라 성인까지 연계된 언어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우리 영어대책은 교육부 차원에만 머문다. 그나마 초.중.고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월 중순에 꾸려진 영어교육 혁신팀도 마찬가지다. 서울대 이병민 교수는 "우린 영어교육이 초.중.고에서 끝나야 한다고 여기고 교육부에 맡겨 둔다"며 "대학은 물론 성인학습까지 염두에 둔 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김남중.고정애(스웨덴.핀란드).이원진(말레이시아) 기자,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파리=박경덕 특파원, 도쿄=이승녕 기자 <social@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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