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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뭐해?" 골프 예찬론 부르짖는 당신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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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시 한수] 전새벽의 시집 읽기(9)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 영업직을 골랐다고 하면 십중팔구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진짜다. 회사생활 5년 차인 지금 아직은 사람 만나는 게 무척 재미있다. 꼬치꼬치 묻는 걸 좋아하는 나는 “초면에 실례지만”이란 말 같은 건 생략하고 상대방이 주말은 어떻게 보내는지, 요새 관심사는 무엇인지를 캐묻는다.

다행히 그 정도 질문에 얼굴을 붉히며 “일 얘기나 합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 종종 재밌는 얘기를 듣게 된다. 지난주에 처음 만난 사람한테 들은 경매학원(나는 부동산 경매학원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얘기처럼.

그런데 재미있는 얘기를 듣게 되는 건 아주 가끔이고, 대개는 뻔한 주제다. 골프다. 대한민국 남자의 관심사 중 하나 아닌가.

사람들을 만나면 골프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사진 freepik]

사람들을 만나면 골프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사진 freepik]

사원 때는 “못 칩니다”라고 말해도 별말이 없었다. 대리가 되니까 한마디씩 한다. “일찍 시작하는 게 좋은데”라든가 “언제 한 번 같이 나가시죠. 제가 알려드릴게”라든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얼마나 필드로 못 불러내 안달인지, 마치 사회획일화를 조장하는 비밀결사단이 골프용품 업계로부터 로비를 받은 뒤 지구를 골프행성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골프 인플레가 심각해지는 이 시대에 나는 수능 날이 다가오는 수험생처럼 불안하다. 언젠가는 항복하게 될까 봐. 시집을 내려놓고 아이언을 쥐게 될까 봐.

감성 자극 제로, 그래도 골프칠래? 

이쯤 하면 골프 마니아는 훈수를 두고 싶을 것이다. “아직 그 재미를 몰라서 그래” 라든가 “나도 그 나이 땐 별로 흥미가 없었지” 라면서. 또 어떤 사람은 언짢아할 수도 있다. 잔디밭에서 땀 흘리며 친목도 쌓는 그 건전한 취미에 대체 무슨 문제가 있냐고 따지면서.

그렇다면 감히 한 말씀 올린다. 죄송하지만 여러분의 취미에는 감수성을 자극하는 부분이 조금도 없다. 그게 문제다. 평생 감수성 계발을 게을리 한 분이 노년의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나는 많이 봐왔다. 그러니 잊지 마시라. ‘홀컵인’ 때의 희열만이 우리가 가진 감정의 전부가 아님을, 때로는 속 시원히 우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잘 울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굳은 감수성을 말랑말랑하게 돌려놓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같이 읽어보자. 사춘기 이후로 감수성을 방치해 온 당신을 위해, 그 시절을 돌이켜보는 시 한 편을 준비했다.

우체통. [사진 pixabay]

우체통. [사진 pixabay]


내 간지러운 사춘기의 후미진 길목에는
지천으로 번진 채송화의 요염한 붉은 빛 따라
남몰래 같은 학교 남학생을 쫓아다니던
축축한 꿈도 있지요만

그 기분 나뿐 미행의 꼬리를
나무라지 않은 안경잡이의 그 넉넉한 마음과도
아쉽게 갈라서버리고
실은 안경잡이의 쌍둥이 누나를 혼자 좋아했는데

안경잡이의 누나는 매정했고
나는 유서를 쓰고 죽는다든지
안경잡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파국의 장면 같은 것을 부질없이 준비했으나

시간은 늙어서 자연이 되고
쌍둥이 남매를 뒤쫓던 학교 앞 공지
공지 담장 위로 오르내리던 남매의 머리끝 같은 것의
리듬이 자아내는 파국 없는 애상을 종종 불러내어

내 현실의 때 묻은 창을 좀 투명하게 하고
가문 하늘에 비구름도 좀 보태어주고 해오던 것인데
그 자연사의 폐허에 서 있지 않고는
삶에 대해, 옅어진 삶에 대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으리라고.

오늘은 내 자신 수취인 없는 개인적 기록으로 앉아
빛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세속 도시를 지우고.
-장이지, ‘우편4, ‘ 전문. 시집 <라플란드 우체국(실천문학, 2013)>에 수록.

시인은 돌연 과거를 반추한다. 돌이켜보면 낯 뜨겁고 가슴께가 간지러운 사춘기의 어느 때를 떠올리고 있다. 좋아했던 동네 누나에게 마음 전할 길이 없어 애꿎은 그의 남동생을 쫓아 거닐던 때, 마음이 전해지지 않아 확 뛰어내리겠다며 으름장을 놓던 때 말이다.

시인은 그때로부터 꽤 멀어졌지만, 이제 와 새삼 그때에 관한 시를 쓴다. 왜? “내 현실의 때 묻은 창을 좀 투명하게” 하려고 쓴다. 때 묻은 창을 닦고 자신을 똑바로 지켜보기 위해 쓴다. 감수성과 두근거림과 내일에 대한 기대가 “옅어진 삶”에 대해 노래하려고 쓴다.

이번 주말 골프대신 시 쓰자  

이번 주말에는 골프장 대신 책상에 앉아 시 한 줄 적어보는건 어떨까? [그림=안충기 기자·화가]

이번 주말에는 골프장 대신 책상에 앉아 시 한 줄 적어보는건 어떨까? [그림=안충기 기자·화가]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백스윙 동작을 점검하고 있는 당신, 혹시 위의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고개가 끄덕여지시려나. 그렇다면 이번 주말은 골프장 대신 책상에 앉아 보는 건 어떨까?

노트를 펴고 손글씨로 지나간 날들에 대해 시 한 줄 써보는 거다. 읽어줄 사람 없어도 괜찮다. ‘수취인 없는 개인적 기록’을 쓰면서 현실의 때를 좀 벗겨 보는 거다. 그렇게 ‘세속 도시’를 지우고 당신의 ‘간지러운 사춘기의 후미진 길목’으로 한 번 돌아가 보는 거다. 혹시 아는가, 다시 만나게 될지. 잊은 지도 몰랐던, 하지만 기억하는 편이 훨씬 좋은, 메마른 감수성을 촉촉하게 만드는 따사로운 어떤 기억들과.

장이지 시인

-1976년 출생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등 발간. 2014년 <라플란드 우체국>으로 오장환 문학상 수상.

전새벽 회사원·작가 jeonjunh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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