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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공짜병 퍼뜨리는 경제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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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인 국공립 미술관·박물관의 무료입장을 2008년 봄 단행하자 우려한대로 사립 시설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경기도 광주에서 입장료 4000원 받으며 작은 박물관을 몇 년째 운영해 온 한 원로예술인은 “내방객이 눈에 띄게 줄고, 초등학교 단체관람마저 국공립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씁쓰레했다. 문화복지를 늘리겠다는 새 정부의 선의가 지역사회 문화서비스 공급의 새싹을 밟아버리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 때 도입한 국공립공원 입장료 공짜정책도 공원 내 위법과 무질서를 키웠다. 관리비용이 늘어 추가로 세금 신세를 졌다.

비용 개념 실종된 퍼주기 정책, 근면성 갉아 먹어 #J노믹스 쇄신, 세금 쉽게 손대는 습성부터 바꿔야

공짜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무실 인근 덕수궁에 오찬 후 산책하러 갔다가 때마침 한 달 한 번인 무료입장일임을 알았을 때는 로또 맞은 기분이었다. 단돈 1000원인데도…. 하지만 공짜 병(病)에 걸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를 부추기는 현 정부의 공짜 정책은 양적·질적으로 이전 정부들보다 한 수 위라서 더욱 그렇다.

가령 깨알 같이 많은 대선 공약의 하나라고 추석·설 두 차례 겨레의 명절 때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해 준 것이 일례다. 빚에 허덕이는 한국도로공사는 이로 인한 1000여억원 매출 손실을 감수했다. 서울시는 미세먼지 대책으로 시내 차량 운행을 줄이겠다고 지난 1월 사흘간 지하철 요금을 면제하느라 150억원의 예산을 썼다. 지난해 신고리 5·6호기 원전 건설 중단으로 인한 손실 1200억원도 관할 공기업인 한국수력원자력이 떠안았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해 비급여를 급여 항목으로 대거 돌리는데 5년간 30조원 넘는 재정이 투입된다. 시끌시끌한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이슈에도 유형은 좀 다르지만, 공짜 개념이 섞여 있다. 이례적으로 일자리안정기금 3조원을 책정해 임금 부담이 늘어난 소상공인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아우성을 잠재울 셈이다. “세수가 수년째 기대 이상이라고 세금을 화수분으로 아느냐”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1분기 빈부 양극화 수준이 사상 최악이라는 통계청 발표에 화들짝 놀란 청와대가 29일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몸소 주재해 150분의 마라톤 회의를 했다. “소득분배 악화는 우리에게 매우 아픈 지점”이라는 대통령의 자책이 예사롭지 않다. 분배 통계치가 소득주도성장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다. 서울 강남세무서 민원창구에는 폐업신고 줄이 번호표 뽑고 기다릴 정도로 자영업 붕괴가 심각하다.

흘러나오는 이야기처럼, 소득주도성장의 줄기는 놔두되 근로장려세제(EITC) 같은 곁가지 지원방안을 만지작거리는 미봉책으론 곤란하다. 우선 두자릿 수 최저임금 인상률이 다섯달 동안 일자리와 저소득층 가계 현장에 무엇을 초래했는지 엄밀히 따져야 한다. 세계 수준의 계량경제학을 뽐내는 학계, 순발력 뛰어난 경제관료들이 모이면 최저임금 효과의 조사·분석 만들어내기 어렵지 않다. 차제에 소득주도성장 논란이 해답 없는 정쟁과 국론분열로 치닫는 것을 막아야 한다.

공짜가 종국에 더 비쌀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공짜를 경험한 곳은 베네수엘라·그리스 같은 나라다. 자유분방한 국민성에 포퓰리즘 정부가 공짜 DNA까지 심은 탓이다. 기업의 공짜마케팅은 장차의 매출을 기대하는 투자 활동이다. 정권의 공짜정책은 납세자 돈으로 쉽게 유권자 매표(買票)를 하려는 선심 생색이거나, ‘아니면 말고’ 식 무책임한 실험과 낭비로 흐르는 게 고작이다. 6·13 지방 선거에서 저질 무상공약을 남발하는 불량 후보의 낙마 운동을 펼쳐야 한다.

“공짜 치즈는 쥐덫에만 있다”(러시아 속담) “공짜점심은 없다”(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는 익숙한 경구를 소박하게 실천하는 분들이 주변에 있다. 65세를 넘겨 지하철 요금 면제지만 “여유 없는 이들만 공짜가 온당하다”면서 꼬박꼬박 티켓을 끊는 어르신의 모습이 더욱 근사해 보이는 요즘이다.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