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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문 대통령이 낚아챈 역사의 상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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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문재인 대통령의 말은 인상적이다. “우리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나라가 아니다.” 지난 22일 워싱턴의 옛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을 둘러보며 한 말이다. 공사관은 그날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고종의 대담한 승부 현장에서 #“외교로 국운을 지키려던 곳” #박정양·이완용·이범진 등 12명 #워싱턴 조선공사관의 교훈은 #부국강병 없는 자주는 파탄 #중재외교는 주인의식이 필수

그곳에서 그런 식의 감상은 실감 난다. 공사관 앞에 서면 미려한 건축미에 놀란다. 공관 구입은 고종의 대담한 승부수였다. 그때 건물 가격은 2만5000달러(현 시세 추산 127만 달러). 가난한 약소국이 감당하기 힘든 액수다. 하지만 자주외교를 위해 과감한 투자를 한 것. 미국에 31개국 공관이 있었다. 조선도 워싱턴 외교가(街)에 당당히 데뷔했다. 문 대통령의 설명은 적확하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외교를 통해 지켜보려던 노력이었다.”

그곳에선 극적 드라마가 넘쳐난다. 공사관은 지금 기준으로 대사관이다. 주미 조선공사(대사)는 12명. 박정양·이하영(서리)·이완용(서리)·이채연·이승수(서리)·이헌직(서리)·박용규(서리)·서광범·이범진·조민희·신태무·김윤정이다. 1888년 1월(공관 개설)~1905년 11월 을사늑약(외교권 상실)까지다. 조선은 개화파 엘리트들을 투입했다. 드라마는 비극으로 마감했다. 1910년 경술국치다. 일본은 5달러에 공관을 강탈했다. 공사들의 삶은 갈렸다. 자결, 매국, 자강, 교육의 길이다.

1880년대 중국(청나라)은 조선을 속국으로 다뤘다. 간섭은 거칠했고 모욕적이었다. 고종의 타개책은 미국을 끌어들이는 것. 그 힘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구상이다. 방법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居中)조정(good offices)’ 규정. 중국은 고종의 의욕을 방해했다. 영약삼단(另約三端)까지 제시했다. 워싱턴에서 청나라 속방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은 참패한다. 그 후 자주·독립 외교의 대상은 일본이다.

박보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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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관 1층 정당의 전시물이 눈길을 끈다. 이범진(9대) 공사가 부인·아들(이위종)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1897년).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로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망국에 통분, 자결했다. 열 살 이위종은 워싱턴에서 영어를 익힌다. 그는 헤이그 만국회의 밀사(통역)가 됐다.

그 옆 작은 액자 사진에 두 명의 여성이 있다. 이완용(3대)·이채연(4대 공사)의 부인이다. 이완용·이채연은 박정양 공사의 보좌진이다. 두 사람은 일시 귀국한다. 다음 해 1889년 다시 미국에 부임했다. 그때 가족과 함께 갔다. 해외 공관에 부인 대동은 처음이다. 이완용의 마지막 길은 친일매국노다. 이채연은 나중에 한성판윤(서울시장)을 맡았다. 그는 덕수궁 앞에 방사형 도로를 만들었다. 워싱턴 공사관 앞 로건 서클에서 영감을 얻었다.

조선 외교관들의 기록은 흥미롭다. 초대 전권공사 박정양의 『美俗拾遺(미속습유)』는 최초의 아메리카 리포트다. 한글 번역본이 최근 출간됐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탈고 130년 만이다. 동국대 한철호 교수의 학문적 열의 덕분이다. 한 교수는 “미속습유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미국과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부국강병 전략에 맞춰져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의 공사관 방명록은 이렇다. “자주외교와 한·미 우호의 상징,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그 말은 역사의 거대한 뿌리에 접목된다. 공사관은 2012년 8월에 재매입했다. 350만 달러의 경비는 이명박 정권의 예산이다. 그때 나는 이런 글을 썼다. “증발했던 대한제국 자주외교의 귀환식을 가져야 한다.” 시점은 11월 을사늑약 107주년 되는 날. 하지만 MB의 청와대는 소극적이었다. 참모들은 공사관 귀환에 무심했다. 박근혜 정권 동안 공사관은 새 단장 중이었다. 그의 워싱턴 방문은 여러 차례다. 하지만 공사관 관람 일정은 없었다. 이번에 문 대통령은 역사의 상징을 낚아챘다.

공사관이 남긴 교훈은 뚜렷하다. 동아시아는 지정학의 냉혹한 무대다. 자주독립 조건은 선명하다. 리더십과 부국강병, 국민의지다. 조선은 요건에 미달했다. 자주외교는 파탄 났다. 미국은 조선에 열정을 투입했다. 조선의 자산은 시원치 않았다. 미국은 관심을 거두었다. 그 시절 동북아 강자는 영국과 러시아. 일본은 영일동맹에 몰두했다. 그 힘으로 러시아 격퇴에 나섰다(1904년 러일전쟁 시작).

한반도 전환의 흐름은 격렬하다. 북·미 정상회담은 변곡점이다. ‘문재인의 한반도 운전석’은 활기차다. 중재의 생명은 균형이다. 북한 핵무기 폐기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문제만이 아니다. 한국의 명운이 걸려 있다. 주인의식이 필수적이다. 중재외교는 그런 투지로 정밀해진다. 지정학은 선택을 요구한다. 북방은 전통적으로 불안하다. 남방의 한·미 동맹은 매력을 발산한다. 옛 공사관은 지혜와 상상력을 생산한다.  <워싱턴에서>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