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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숙청 무풍지대 북 외교라인 … 생존 비결은 ‘관용 문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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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무자비한 숙청이 벌어져 온 김정은 정권 내부에 딴 세상인 곳이 있다. 북한 대외·외교 정책의 본산인 외무성이다. 군부와 노동당·내각은 물론 권력 핵심 기구인 국가보위성과 군 총정치국 간부도 김정은 눈 밖에 나면 해임·강등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한다. 유독 외교 관리들만 열외다. 군부 원로나 베테랑 대남라인도 피해가지 못하는 숙청의 칼날에서 무풍지대로 남을 수 있는 그들만의 생존법은 무엇인지 짚어본다.

최선희 비난 담화에 트럼프 초강수 #문책설 불구 실무회담 대표로 건재 #대체 인력 없고 회담 임박해 부담 #태영호 “외무성 관용적 태도 때문” #처형·몰락한 대남라인과 차이 #살아남은 건 군부출신 김영철 뿐

북한 권력 내부에서 실수는 좀체 용납되지 않는다. 이른바 ‘최고존엄’이라고 떠받들어지는 김씨 일가와 관련한 사안은 특히 그렇다. 주민 삶을 옥죄는 ‘유일 영도 10대 원칙’은 김일성·김정일의 ‘권위’를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훼손하려는 자그마한 요소도 절대 융화묵과하지 말고 비상사건화해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야말로 숨 쉴 틈이 없어 보인다. 김일성 초상화 액자의 먼지를 닦지 않았다거나, 사소한 말실수를 했다가 결국 탈북·망명의 길에 나섰다는 증언이 끊이지 않는 건 이런 분위기의 반영이다.

잘 나가던 유명 인사가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지난 8일 오후 8시 북한 관영 조선중앙TV는 김정은의 중국 방문 소식을 내보냈다. 이틀간의 전격적인 방중 일정을 마치고 이날 평양으로 귀환한 장면을 처음 공개하는 17분 분량의 보도였다. 최고지도자 동정을 일컫는 소위 ‘1호 보도’ 전담인 이춘희 아나운서가 등장했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평소와 달리 돋보기 안경까지 쓰고 등장한 이춘희는 초반부터 말을 더듬거나 발음이 꼬이는 실수를 연발했다. 당혹감 때문인지 시선 처리와 호흡이 불안했다. 46년 차 베테랑답지 않게 같은 문장을 두 번이나 읽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비밀에 부쳐졌던 김정은의 중국 방문 소식을 저녁 종합뉴스에 급히 맞추다 보니 문제가 생긴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이춘희는 TV에서 사라졌고, 26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소식은 후배 아나운서가 바통을 이어받아 전했다. 21년 전 김일성 사망 3주기 방송을 하던 여성 아나운서가 “김정일 수령 사망 3년이 됐다”는 대형사고를 치고 ‘실종’된 이후 최악의 방송 참사로 기록될 듯하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북한 외무성의 대미(對美)라인도 지난주 아찔한 경험을 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장외 기싸움에서 트럼프 행정부를 지나치게 압박하다 자칫 회담판을 깰 뻔한 상황을 자초한 것이다. 외무성은 치밀하게 움직였다.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은 16일 담화에서 “조·미 수뇌회담(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지금 미국에서 대화 상대방을 심히 자극하는 망발들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는 건 극히 온당치 못한 처사”라며 포문을 열었다. 24일엔 최선희 부상이 한 발 더 나갔다. 그는 워싱턴 측의 북핵 폐기·이관 요구를 비난하며 “미국이 지금까지 체험해 보지 못했고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비극을 맛보게 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미국과의 신경전에서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말폭탄이었지만 사태는 꼬였다. 불과 14시간 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북·미 정상회담 취소 서한을 공개하는 초강수를 둔 때문이다. 트럼프는 회담 취소 통보가 북측의 비난담화 때문임을 숨기지 않았다.

북한은 즉각 꼬리를 내렸다. 김계관 제1부상은 “언제 어디서든 미국과 만날 것”이라며 북·미 정상회담을 갈망하고 있음을 알렸다. 최선희 담화에 대해선 “미국 측의 지나친 언행이 불러온 반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의미를 깎아내렸다. 이 대목을 두고 김계관이 최선희에게 사태의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구태의연한 으름장 공세로 미국과의 정상 회담판을 파국으로 몰고 간 대미라인에 문책이 따를 것이란 전망도 제기됐다. 김정은이 연초부터 공들인 북·미 담판을 헝클어트렸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최선희 부상이 판문점 비공개 북 ·미 실무협의에 북측 대표로 나온 것으로 파악되면서 관측은 빗나갔다. 이를 두고 우리 정부 안팎에선 대미사안을 챙길 북한 외교 엘리트 풀이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2년 전 숨진 강석주 외교담당 부총리에 이어 김계관-이용호(외무상)-최선희로 이어지는 대미 라인은 후보 선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단출한 편이다. 대북 소식통은 “최선희에 대한 김정은의 신임이 두터운 데다, 설사 문책을 검토한다 해도 전투에 임박해 장수를 교체하기 쉽지 않은 상황일 것”이라고 말했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가 전하는 외무성의 속사정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다른 기관처럼 김정일·김정은 지시라고 무조건 “알겠습니다”하고 집행하지 않는 조직문화가 있다고 한다. 하달 내용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되면 ‘지시대로 하면 이런 점은 좋겠지만 간혹 이런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보고한다. 재차 상부 검토가 이뤄지고 외무성의 부담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화폐개혁 지시를 그대로 밀어붙였다가 주민 반발 책임을 뒤집어쓰고 총살당한 박남기 당 계획재정부장의 경우와 비교된다는 얘기다.

외무성 구성원들의 관용적 태도도 숙청의 피바람을 비껴갈 수 있는 비결이라고 태 전 공사는 지적한다. 그는 최근 펴낸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2013년 말 장성택 처형 당시 외무성의 대처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장성택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대사·참사 등이 평양으로 소환될 때 김계관 제1부상은 “소환 통보 때 상주국 정보요원이 탈북을 권유했지만 평양의 하늘만 바라보고 조국에 들어온 충성심 높은 동무들”이라며 선처를 요청하는 서한을 김정은에게 썼다고 한다. 태 전 공사는 “3~4년 주기로 해외 근무를 하는 외무성 성원들은 북한 체제의 불합리성을 잘 알고 있다”며 “동료의 체제불만 표출을 고발하기보다는 웃고 넘어간다”고 말했다. 상호비판 모임에서도 신사적 태도를 지키고 홍위병식 공격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반짝 출세길을 걷다 대부분 몰락한 대남라인과 비교된다. 태 전 공사는 “김용순·김양건(전 통일전선부장)은 목격자 한 사람 없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통전부 부부장 최승철과 한시해 등은 총살됐다”고 말했다. 남북 장관급회담 단장이던 김영성을 비롯해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대남접촉을 주도한 북측 인사 상당수도 행적이 묘연하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12월 극비 방한한 국가안전보위부 류경 부부장은 이듬해 초 간첩혐의로 처형됐다. 태 전 공사는 “북한에서 한국과 사업한다는 건 한 발을 저승에 걸어놓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남북대화에 관여한 간부 중 남북 기본합의서(1991 체결) 이후 현재까지 건재한 쪽은 군부 출신인 김영철 통전부장 딱 한 라인뿐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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