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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에든버러식 공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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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스코틀랜드 출장 중 잠시 들른 에든버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우연히 마주친 에든버러 마라톤이었다. 영국에선 런던 마라톤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기록도 좋은 연례 국제대회로, 올해 역시 케냐 등 전 세계에서 몰려든 정상급 마라토너와 일반 시민들이 26~27일 이틀에 나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구시가지를 누볐다. 『국부론』을 쓴 아담 스미스의 무덤이 있는 캐논게이트 교회 등 중세의 고풍스런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올드 타운 속 좁은 2차선 도로 위로 수천 명의 마라토너가 달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에든버러 구시가지 로얄 마일을 달리는 2018 에든버러 마라톤 참가자들.

에든버러 구시가지 로얄 마일을 달리는 2018 에든버러 마라톤 참가자들.

하지만 뜻밖의 감동으로 다가온 건 가이드 러너(동반 주자) 손을 잡고 뛰던 어떤 시각장애인이었다.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휠체어를 탄 선수도 눈에 띄었다. 일반인과 장애인이 아무 장벽 없이 섞여 뛰는 이 장면이야말로 영국이 왜 장애인 선진국인지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앞서 지난 4월 런던 마라톤에서는 하반신이 마비된 35세의 영국 남성 사이먼 카인들리사이드가 '특수 슈트'를 착용하고 36시간 46분 만에 풀 코스를 완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런 도전이 가능한 건 본인의 의지가 강한 덕분이지만 영국이라는 환경도 무시할 수 없다. 영국은 1995년 제정한 장애차별금지법과 자립생활기금 등을 통해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사회의 일원으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보편적 인식을 갖춘 몇 안 되는 나라다. 그렇다 보니 마라톤 같은 큰 이벤트는 물론이요 일상생활에서도 장애인의 자유로운 이동을 방해하는 장벽을 없애려는 노력을 꾸준히 한다.
영국의 몇몇 도시를 다녀보니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결국 모든 시민에게 혜택으로 돌아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경사로 덕분에 어린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는 어렵지 않게 유모차를 끌고 에든버러 캐슬 위에서 탁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었고, 무거운 짐을 끄는 여행객도 지친 다리를 덜 피곤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처럼 장애인을 포용하는 사회 구성원이 더 많은 혜택을 본다는 건 이미 여러 연구로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장애는 더 이상 남의 일도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세계장애보고서(2012)에 따르면 전 세계 15세 이상 인구의 15.6%, 그러니까 10억 명이 넘는 사람이 선천적 장애 이외에도 재해와 질병·노령 등에 따른 장애를 안고 산다고 한다. 장애가 소수의 문제라기보다 우리 모두가 잠재적 장애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배려는커녕 장애인학교조차 허용하지 않는 식의 배제로 장애인을 자꾸 우리와 멀리 떼어놓으려만 한다. 비단 장애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나와 다른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우리에게 에든버러 마라톤이 보여준 공존의 방식이 부럽기만 하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