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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시조백일장 장원 김종순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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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벽화

김종순

양지바른 곳으로 나와 앉은 할머니들
담벼락에 무채색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든
빛바랜 점묘들

주름을 말리느라 햇살들 분주하고
희미한 배경색으로 기억들이 다가오면
한때는 꽃이었던 시절
대낮처럼 환하네

허공을 응시해 보는 뜨거운 눈빛이여
수없이 그리고 색칠하고 싶은 그 자리
지금은 여백 속으로
새들이 날고 있다

김종순

김종순

◇김종순=1964년 경남 함안 출생. 창원대 독문과. 현재 상담심리사. 자유시집 『식탁에 앉은 밭이랑』『물방울 위를 걷다』. 기성 시조시인 작품집 보며 시조 독학.

<차상>  

그 여자, 마네킹

유영희

축 처진 두 어깨가 저녁을 끌고 간다
낮 동안 켜 놓았던 삼십 촉 백열등이
어둠에 살점 뜯긴 채 끌려가는 모퉁이

비좁은 시장골목 붉은 유리창 너머
유행도 신상품도 알지 못하는 여자
온종일 비닐 앞치마 입고 고기를 썬다

그녀의 패션에는 추종자가 없다는 것
도마와 목장갑이 유일한 소품이다
고개도 꺾지 못한 채 가끔 웃는 그 여자

<차하>

코스프레

설경미

몇 바퀴를 돌아도 보이잖는 빈자리
오늘만, 딱 한 번만 내밀고 걸어본다
임산부 주차장에서 오십 줄에 분장놀이

허리에 손을 얹어 양심을 꾹 누르고
졸린 듯 눈 비비고 거짓말에 두리번
저기요 하는 소리에 지레 놀라 멈춘다

이달의 심사평
지난달의 풍성함에 비해 이번 달은 잠시 숨을 돌리고 가는 모습이다. 신록의 터진 틈으로 스며드는 햇살과, 그 아래의 그늘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장원에 오른 김종순의 '벽화'에는 “양지바른 곳”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노년의 형상이 담벼락 위에 실루엣처럼 걸려 있다. “주름을 말리느라 햇살들 분주”할 때 꽃이었던 기억들로 환해지지만, 그건 허공을 더듬어 되짚어본 희미한 배경색 위에 잠시간 떠올랐다 사라진다. 쇠라의 점묘화를 보듯, 생의 한 장면을 덧없는 햇살그림으로 이미지화하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차상으로 유영희의 '그 여자, 마네킹'을 올린다. 그 여자의 형상은 마네킹으로 은유된다. “유행도 신상품도” 알지 못하지만 “삼십 촉 백열등”이 켜진 “붉은 유리창 너머”에 그녀의 삶이 전시되어 있다. 활달한 시상 전개를 바탕으로 마네킹에 비유된 여성의 삶이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수작이다. 동봉한 다른 작품이 따라주지 못했다.
 차하에는 설경미의 '코스프레'를 올린다. 임산부용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새삼 임산부 흉내, 즉 “코스프레”를 하며 지레 겁먹는다는 내용의 글이다. “오십” 대 여성의 심리를 완곡하게 드러낸 것에 비해, 직설적인 어법과 완결성 부족이 지적되었다.
 이 밖에도 조우리·최경미·정화경의 작품이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 분발을 당부드린다. 심사위원: 박권숙·염창권(대표집필 염창권)

<초대시조>

신발의 역사

서희정

귀가 후 현관 앞엔 한 가족이 엉켜 있다

한밤중 불을 켜자 부스스 깨다 말고
고단한 하루를 눕힌 채 잠꼬대가 한창이다

그 잠꼬대 잦아들자 희멀건 새벽달이
빠끔히 베란다를 넘어와서 기웃대더니
새하얀 홑이불 같은 달빛 풀어 덮어 준다

뒤 굽이 닳은 채로 널브러진 구두들이
지고 갈 또 하루를 채근하며 기다린다
제각각 갈 길이 달라도 두말 없는 순종이다

◇서희정=1990년 서울 출생. 한성대 무역학과 졸업. 2017년 한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18 좋은 시조’라는 책을 넘기는데, 세계와 인간에 대한 드높은 사랑을 쉽고도 구체적인 언어로 포착한 시조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작자 서희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분이었다. 검색해 보았더니, 작년에 등단한 20대 후반의 젊은 시인이다. 이 젊은 시인의 앞날을 뜨겁게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시조를 초대키로 했다.

 ‘신발의 역사’는 가족들이 모두 귀가한 후에, 현관 앞에 흩어져 있는 낡은 신발들을 바라보는 데서 시상이 시작된다. 시적 화자는 서로 뒤엉켜서 나뒹굴고 있는 이 신발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인식한다. 이른바 ‘신발 가족’이다. 지금 ‘진짜 가족’들이 고단한 하루의 일정을 끝내고 서로 뒤엉켜서 잠꼬대를 하며 잠을 자고 있듯이, ‘신발 가족’들도 현관 앞에 서로 뒤엉켜서 “고단한 하루를 눕힌 채” 지금 “잠꼬대가 한창이다.” 더러 하품을 하기도 하고. 이윽고 ‘희멀건 새벽달이 베란다를 넘어와 새하얀 달빛 이불’로 ‘신발 가족’들을 덮어 준다. 마치 어머니가 이불을 걷어차고 자고 있는 가족들에게 새하얀 이불을 다시 덮어주듯이.
 이처럼 작품 속의 ‘신발 가족’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가족’들의 모습과 겹쳐져 있는데, 이 점은 마지막 수에서도 다시 한번 드러난다. “지고 갈 하루를 채근하며 기다리”는 문맥상의 주체는 물론 “뒷굽이 닳은 채로 널브러진 구두”다. 하지만 이 대목의 실제 주체는 그 구두를 신고 제각각의 하루를 “두말 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구두의 주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진짜 가족’과 ‘구두 가족’의 합일에서 느껴지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참 애틋하고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랑 앞에 가슴이 짠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종문(시조시인)

◇응모안내=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지식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04513) 또는 e메일(choi.sohyeo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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