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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문재인-트럼프 간 불신 해소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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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지난 22일의 한·미 정상회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때론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사실을 보여준 자리였다.

다른 스타일에 시각 차로 신뢰 부족 #노 대통령처럼 행동으로 믿음 쌓아야

트럼프가 문재인 대통령을 옆에 둔 채 36분간이나 인터뷰를 한 건 예의가 아니다. 그는 문 대통령의 마지막 발언은 “통역할 필요도 없다”며 내쳤다.

장황한 인터뷰 탓에 30분으로 잡혔던 비공개 회담은 21분으로 줄었다. 통역을 썼으니 문 대통령 발언은 5분 남짓이었을 게다. 모두 발언까지 합쳐도 10분밖에 안 될 말을 하자고 왕복 28시간을 날았다. 성의를 봐서라도 충분한 발언 시간을 주는 게 도리였다.

이번 만남에는 외교 참사로 꼽히는 2001년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당시 김대중(DJ) 대통령은 “김정일이 함께 일할 만한 파트너”라며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을 권했다가 큰 반발을 샀다. 부시는 즉각 “국민을 굶겨 죽이는 독재자와 일하란 말이냐”며 화를 냈다. 김정일에 대한 부시의 증오를 모른 채 상대한 게 패착이다.

이번에도 비슷했다. 북·미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싱가포르 회의에 북한 측은 안 나타났다. 지난 16일에는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핵 포기를 강요하면 북·미 회담을 재고하겠다”고 협박했다. 트럼프가 화가 날 대로 날 상황이었다. 이런 그에게 “북·미 간에 수교하고 정상적 관계를 할 수 있을 거로 확신한다”고 문 대통령이 촉구했으니 트럼프로서는 꽤 언짢았을 게다.

게다가 트럼프가 문 대통령을 거북해할 이유도 있다. 무역적자 때문이다. “(트럼프가) 무역으로 자기 나라를 우려먹는다고 믿는 국가의 지도자를 어떻게 좋아하겠나”라는 미 폴리티코의 분석에도 일리가 있다.

트럼프가 높이 치는 지도자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그리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라고 한다. 죄다 강력한 리더십의 철권 통치자다. 주변 의견을 경청하고 부드럽기 그지없는 문 대통령과는 다른 스타일이다.

요즘 트럼프 눈에는 한국이 북·미 간 일에 너무 참견하고 북한 입장만 대변하는 것으로 비쳤을지 모른다. “비핵화 문제에 한국이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라고 미국이 요청했다”는 이낙연 총리의 어제 설명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니 26일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얼싸안은 모습도 마뜩잖을 수 있다. 그럴수록 한·미 정상 간에 불신이 싹트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지금 뜻이 안 맞는다고 조바심 낼 건 없다. DJ를 이은 노무현 대통령도 부시와 못 지내긴 마찬가지였다. 괄괄한 노 대통령은 거의 만날 때마다 부시와 다퉜다. 2005년 11월 경주에서는 대북 금융제재를 놓고 한 시간 넘게 말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당시 백악관 참모였던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시는 노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고 믿었다”고 수년 전 한 사석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말만 번지르르한 유럽 정상들과는 달리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시 재임 중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을 장담하고도 약속을 안 지켰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달랐다. 그는 거센 반대에도 이라크에 파병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다. 비자 면제 및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도 이뤄 냈다.

북한 비핵화 후에도 한·미가 손잡고 풀어야 할 난제는 태산이다. 당장 한·미 무역 분쟁과 대북 지원이 기다린다. 이를 순조롭게 풀려면 두 정상 간에 행동으로 증명된 신뢰가 켜켜이 쌓여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