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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반전(反轉), D-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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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

아찔했다. 팔천만 겨레의 꿈이 강물 속에 처박힐 뻔했다. 비핵화 담판의 두 주역을 태운 차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기 직전 운전사가 핸들을 틀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순발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지난 토요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은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측 통일각으로 내달렸다. 경호와 격식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측근 소수에만 알린 채 통치자가 북방한계선을 넘은 초유의 사건이었다. 군이 비상경계령을 은밀히 내렸겠으나 그만큼 절박했던 거다. 워싱턴의 신호등이 적색에서 청색으로 바뀌었다.

비핵화 방식은 아직 오리무중 #북한이 보검을 쉽게 내줄까 #김정은 유인하는 인내가 필요 #유인 이후에는 출구 차단하는 #단순명료한 해법은 없을까

그러기에 왜 그리 ‘주제넘게 놀아댔’는가. 사실 탈선 위기의 책임은 북·미 양측에 다 있다. 이 역사적 대전환 앞에서 양측 모두 입방아를 찧지 않고 좀 지긋하게 물밑 접촉을 했다면 이런 사태까지 가진 않았을 것이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제멋대로 강경 발언을 쏟아낸 게 트럼프의 진짜 전술인지 모르지만 입단속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에 질세라 막말의 끝판왕 북한이 장사포를 쏴댔다. 펜스는 ‘얼치기 촌뜨기’, 볼턴은 ‘사이비 우국지사’로 비하됐다. ‘선(先) 핵 폐기, 후(後) 보상’이란 매수 조건에 선뜻 응할 장사꾼이 어디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횡설수설 주제넘게 놀아댔다’고 욕설을 퍼부으면 흥정은 끝이다. 정말 끝날 뻔했다.

북한의 핵 외교는 이른바 ‘쌍궤도 전술’로 이뤄진다는 게 탈북 북한 공사 태영호의 증언이다(『3층 서기실의 암호』, 이하 『암호』). 북한의 생명줄인 핵은 전적으로 중앙당 소관이다. 김계관과 최선희가 속한 외무성은 중앙당의 지령을 연기하는 바람잡이다. ‘일격에 끝장내는 비핵화’라면 아예 접자는 중앙당의 결사 의지를 그렇게 천박한 칼춤으로 연출했다. 미국이 움찔하길 기대했겠으나 ‘거래의 달인’ 트럼프는 엎어치기로 응수했다. 풍계리 폭파는 트럼프의 느닷없는 일갈에 묻혔다. 오히려 당황한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SOS를 타전했다.

송호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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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 중에 누가 설득하고 누가 설득당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친구처럼 만나고 격의 없이 소통해야 한다’는 근사한 말에 내막이 덮였다. 김정은 위원장이 통일각으로 향하던 그 시각에 북한 대외선전용 SNS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경애하는 원수님을 따라가면 민족의 앞길에 평화도 번영도 통일도 온다…. 그이의 힘찬 발걸음에 겨레의 봄이 실리었다.” 김정일 후계사업이 본격화되던 2009년 북한 중앙TV가 보급하던 노래가 ‘발걸음’이었다(『암호』). “척척척 척척 발걸음/우리 김 대장 발걸음/…/발걸음 발걸음 힘차게 한번 구르면/온 나라 인민이 따라서 척척척.” 그 김 대장이 김정은이었는데 그 이가 ‘척척척’ 달려와 ‘척척척’ 말하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랬더니 사태가 다시 반전됐고 세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핵화의 방식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D-14, 이 시점에서 묻고 싶다. 매물로 나온 게 정말 핵(核)일까? 아니면 가면무도회 입장권일까? 외신기자들은 풍계리 폭파가 장관이었다고 전하지만 사실은 용도 폐기된 핵실험장 입구를 막은 정도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김정은의 발걸음이 그렇다. 김정은은 2012년 4월 핵보유국임을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할아버지 유업을 완성했다. 3차 핵실험을 거쳐 2013년 3월 핵·경제 병진노선을 천명했고, 2015년을 ‘조국통일 대사변의 해’로 공포했다. 그러곤 2017년 ‘핵 무력 완성과 핵 질주’를 거쳐 2018년 ‘평화무드 조성의 해’로 돌입했다. 평창올림픽이 그이의 발걸음에 딱 맞아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 노력과 남한의 애절한 희망이 그의 발걸음에 놀아나는 건 아닌지 트럼프의 뚝심을 믿어 볼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핵무기는 대체 어디에 갈무리해 뒀을까. 은곡농장이란 게 있다. 백두혈통과 혁명엘리트 가족들에게 주식과 고기를 조달하는 특수 농장인데, 북한은 이런 곳을 여러 개 운영 중이다. 김정은과 중앙당이 소형화된 핵폭탄 수십 발, ICBM과 미사일 수백 발을 남몰래 은닉할 장소는 차고 넘친다는 얘기다. 비핵화 담판 후 핵사찰을 대비해 분산 배치해 뒀을 것이다. 체제보장에 위험신호가 오면 소형 핵탄두를 하나 꺼내들 테고, 경제 보상이 시원찮으면 ICBM을 한 발 날릴 것임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다. 강경파 존 볼턴이 아예 몽땅 들어내 테네시주 핵무기 창고에 이관해야 한다고 외친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맞는 말이지만 자신의 보검(寶劍)을 선뜻 내줄 나라가 어디 있을까?

곳간이 빈 김정은도 안이 달았다. 평화무드를 연출하며 발걸음을 척척 내디딘 김정은을 일단 협곡으로 유인하는 인내가 필요하겠다. D-14, 유인 이후엔 출구 차단, 뭐 이런 단순명료한 해법은 없을까? 또 다른 반전은 사절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