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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도 배우는 '공짜 통계 소프트웨어' 만든 65세 노교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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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진 숭실대 정보통계보험수리학과 교수 [숭실대 제공]

이정진 숭실대 정보통계보험수리학과 교수 [숭실대 제공]

빅데이터 시대라는데 정작 초·중·고교생이 데이터와 통계를 배울만한 프로그램은 없어요. 그래서 누구나 '공짜'로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기로 했죠.

이정진(65) 숭실대 정보통계보험수리학과 교수는 국내 통계분석 소프트웨어 분야의 1세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셀', IBM의 'SPSS'처럼 외국산이 점령한 통계 관련 프로그램의 국산화를 꿈꿔왔다.

정년 퇴임을 1년 앞둔 이 교수는 최근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쓸 수 있는 통계분석 프로그램 'eStat'(www.estat.me)을 개발했다. 웹 기반이라 다운로드나 설치도 필요 없이 접속하기만 하면 PC나 모바일에서도 쓸 수 있다. 40여년을 통계 연구에 몰두한 백발의 노(老)교수의 마지막 프로젝트다.

지난 2012년 미국의 교육용 통계 프로그램을 접한 그는 충격을 받았다. 데이터를 여러 가지 그래프로 그릴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쓸 수 있었다. 그는 "우리처럼 공책에 자와 연필로 그래프를 그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교육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이정진 숭실대 교수가 개발한 통계 교육용 소프트웨어 eStat 화면. 교과서에 나오는 통계 수치뿐 아니라 직접 수치를 입력하면 다양한 종류의 그래프를 그리거나 통계 분석을 해볼 수 있다. [홈페이지 캡처]

이정진 숭실대 교수가 개발한 통계 교육용 소프트웨어 eStat 화면. 교과서에 나오는 통계 수치뿐 아니라 직접 수치를 입력하면 다양한 종류의 그래프를 그리거나 통계 분석을 해볼 수 있다. [홈페이지 캡처]

하지만 미국 프로그램은 가격이 비쌌고 미국 교과서에 바탕을 두고 있어 우리나라 학교에는 맞지 않았다. 이 교수는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하고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뒤졌다. 중·고교는 물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여러 통계 자료가 들어있었다. 예를 들어 사회 과목에선 '일본강점기 쌀 생산량과 수탈량', 과학 과목에선 '각 행성의 반지름', '우리나라 해역 오염 현황' 등이 있었다. 그는 이런 데이터를 학생들이 직접 다양한 그래프로 그려볼 수 있도록 했다. 교과서에서 그냥 그래프를 보고 지나가는 것과 직접 그려보는 것은 교육 효과가 다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통계청의 지원을 받아 개발을 시작했지만 2015년부터 지원이 끊겼다. 당장 프로그래머도 고용할 수 없게 됐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다'고 생각했다. 이 교수는 직접 프로그래밍에 손을 댔다.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생기면서 초중고교생뿐 아니라 대학생도 쓸 수 있도록 복잡한 통계 계산식까지 탑재했다.

이정진 교수가 숭실대 강의실에서 자신이 개발한 무료 통계 분석 교육용 소프트웨어인 'eStat'을 시연해보고 있다. [숭실대 제공]

이정진 교수가 숭실대 강의실에서 자신이 개발한 무료 통계 분석 교육용 소프트웨어인 'eStat'을 시연해보고 있다. [숭실대 제공]

프로그램 작업은 밤에도 계속됐다. 좀처럼 해결이 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막히는 부분은 인터넷에 질문을 올렸다. 전 세계 익명의 전문가들이 답변을 달아줬다. 누군가 이미 만들어놓은 공개 프로그램을 참고하기도 했다. 그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인터넷 공간의 전문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도 전 세계 누구나 쓸 수 있는 공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최종 개발까지는 국내외 연구자들이 힘을 보탰다. 해외 연구자들은 프로그램을 점검하면서 선뜻 자기 국가 언어로 번역까지 했다. 덕분에 eStat은 이미 영어·일본어·중국어·프랑스어·스페인어로 번역이 완성됐다. 그는 "세계 모든 학생, 특히 저개발 국가의 어린이들이 쉽게 통계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은퇴 후에도 eStat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나갈 계획이다. 그는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교육이 이뤄지려면 통계뿐 아니라 수학교육자, 언어 전문가, 지리학자, 프로그래머 등 여러 분야에서 힘을 모아야 한다. 은퇴 후에도 많은 분의 참여로 뜻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남윤서 기자 nam.yoonse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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