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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내셔널]1902년 102명 출국.. 한국 이민의 역사 한눈에

중앙일보

입력

 이민자 이름이 적혀 있는 전시물. 임명수 기자

이민자 이름이 적혀 있는 전시물. 임명수 기자

1902년 12월 22일 월요일, 121명이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 우선주식회사의 현해환(玄海丸·겐카이마루)호에 승선했다. 이들은 이틀 후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했다. 같은 해 12월 24일 검역소에서 신체검사와 예방접종을 받는 과정에서 몸이 쇠약한 19명이 탈락했다. 검사를 통과한 102명은 같은 날 하와이로 가는 미국 태평양 횡단 기선 갤릭호(S.S. Gaelic)에 다시 올랐다. 20일 후인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에 도착했다. 배 안에서 또다시 환자 16명이 발견돼 중도 탈락했다. 호놀룰루 상륙허가를 받은 이는 86명이었다. 이후 1905년 8월 8일 마지막 공식 이민이 끝날 때까지 64회에 걸쳐 7415명이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인천 중구에 위치한 이민사박물관 1층 로비. 임명수 기자

인천 중구에 위치한 이민사박물관 1층 로비. 임명수 기자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자(移民者)얘기다. 이들은 당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행한 집조(현재의 여권)를 받고 떠났다. 비공식적으로는 1860년대 연해주(沿海州)와 만주(滿洲) 등으로 떠난 지금의 중국 동포(조선족)들도 있지만, 이들은 개별적으로 떠났다고 한다.

1902년 하와이 첫 이민자들이 타고 간 미국 선박 갤릭호. 임명수 기자

1902년 하와이 첫 이민자들이 타고 간 미국 선박 갤릭호. 임명수 기자

대한민국 이민의 역사를 한눈에

이민자들의 삶, 그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담아낸 곳이 바로 한국이민사박물관(The Museum of Korea Emigration History)이다. 인천시가 2003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이들의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인천시가 건립 추진을 시작해 2008년 준공했다. 중구 월미도에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박물관으로 올 6월 개관 10주년을 맞이한다.

지난 25일 박물관을 찾아 김동근 학예사의 안내로 박물관을 둘러봤다. 박물관은 2층 규모다.  2층은 첫 이민이자 미주 이민을 위주로, 1층은 멕시코와 쿠바, 러시아 등 다른 나라 이민사가 기록돼 있다. 현재까지 이민자는 700만 명에 이른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우리나라 첫 이민자들이 지니고 있던 집조(여권). 임명수 기자

우리나라 첫 이민자들이 지니고 있던 집조(여권). 임명수 기자

이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꿈이 교차했을 터. 하지만 그 시작은 아름답지 않았다. 지속된 가뭄과 혹독한 굶주림이 계속되던 19세기 말. 임오군란(壬午軍亂·1882)과 갑신정변(甲申政變·1884) 등으로 사회적 혼란은 커져만 갔다. 러·일전쟁(1904)을 앞둔 일본은 한반도에서 쌀과 곡물들을 대량으로 빼앗아 갔다.
빈곤과 불안한 정세를 벗어나려는 움직임, 우리 이민의 시작인 것이다.

제1 전시실 모습. '도전지의 출발지 인천'의 상황을 전시하고 있다. 임명수 기자

제1 전시실 모습. '도전지의 출발지 인천'의 상황을 전시하고 있다. 임명수 기자

첫 이민자들의 삶, 아름답지 않은 이민

19세기 중엽,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농장이 본격적으로 조성됐다고 한다. 설탕 수요가 증가하면서다. 1880년대 원주민들의 노동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농장주들은 중국과 일본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중국인과 일본인이 점차 노동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자 한국으로 눈을 돌렸다.  노동력이 절실한 농장주와 굶주림을 벗어나려는 한국의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사탕수사밭 노동은 혹독했다. 2층 제2전시실 입구에는 가죽 채찍이 하나 있다. 농장 관리자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이 가죽 채찍으로 노동자들을 감시했다고 한다.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오전 6시부터 일을 시작했다. 점심시간은 고작 30분. 오후 4시30분까지 하루 10시간씩 일했다고 한다. 일주일에 단 하루 일요일만 쉴 수 있었다.

하와이 첫 이민자들은 사실상 노예 계약을 했다. 당시 농장 관리인이 이민자들에게 사용하던 채찍. 임명수 기자

하와이 첫 이민자들은 사실상 노예 계약을 했다. 당시 농장 관리인이 이민자들에게 사용하던 채찍. 임명수 기자

한국 이민사를 볼 수 있는 인천 이민사박물관. [사진 이민사박물관]

한국 이민사를 볼 수 있는 인천 이민사박물관. [사진 이민사박물관]

하와이 이민자의 결혼을 위해 국내에서 보냈던 신부들의 사진과 글. 임명수 기자

하와이 이민자의 결혼을 위해 국내에서 보냈던 신부들의 사진과 글. 임명수 기자

전시관 가운데에 독특한 전시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 신부’라고 적혀 있었다. 여성의 얼굴 사진 한장으로 결혼 상대를 골랐다는 데서 기인한다. 전시된 책자에는 여성의 이름과 결혼 이유, 삶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김 학예사는 “하와이로 온 이민자들은 혼기가 꽉 찬 남성들이고, 하와이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10배나 많아 결혼하기 쉽지 않았다”며 “이들의 결혼을 위한 궁여지책이 바로 사진 신부”라고 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쟁이들이 700여 명의 사진만 들고 하와이로 건너와 주선했다고 한다. 사진만 보고 결정하다 보니 나이 차이가 15살인 부부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 이민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60년대 해외 이민이 많이 늘었다. [사진 이민사박물관]

한국 이민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60년대 해외 이민이 많이 늘었다. [사진 이민사박물관]

또 다른 이민, 멕시코로 간 사람들

1905년 1033명의 한인이 이역만리 낯선 멕시코에 도착했다. 이민 중개인에 의해 단 한 차례로 끝난 대규모 불법 노동이민이었다고 한다.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이 있었다면, 멕시코에는 에네켄(용설란·龍舌蘭) 농장이 있었다. 에네켄 잎을 잘라서 으깨면 흰 실타래가 되는데 이것을 묶어 선박용 로프나 마대용 자루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4년간의 계약이 끝났지만, 멕시코 내란 등으로 이들 중 일부가 쿠바로 넘어갔다.

하와이로 이민 갔다가 노동 계약이 끝난 뒤 멕시코로 넘어간 이민자들이 노동을 하는 모습을 재현한 전시물. [사진 이민사박물관]

하와이로 이민 갔다가 노동 계약이 끝난 뒤 멕시코로 넘어간 이민자들이 노동을 하는 모습을 재현한 전시물. [사진 이민사박물관]

한국이민사박물관 전경. [사진 이민사박물관]

한국이민사박물관 전경. [사진 이민사박물관]

한국이민사박물관은 개관 10주년을 맞아 리모델링을 준비 중이다. 2층 1전시실~2전시실은 대부분 그대로 존치된다. 1층 3~4전시실은 남미 이민사 위주에서 탈피, 유럽과 아시아, 러시아와 중남미, 입양 전시코너 등을 신설한다. 신은미 관장은 “이민의 시작은 아름답지 않지만, 미지의 세계로 향한 선조들의 개척자적인 정신을 되돌아볼 좋은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민사박물관 관람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오후 5시 30분까지 입장)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공휴일인 경우 제외)이며 요금은 무료다. 문의 전화는 032-440-4710.

인천=임명수 기자 lim.myoung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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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이후 3년 동안 64회에 걸쳐 7415명이 하와이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사진은 당시 이민자 이름이 적혀 있는 전시물. 임명수 기자

1902년 이후 3년 동안 64회에 걸쳐 7415명이 하와이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사진은 당시 이민자 이름이 적혀 있는 전시물. 임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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