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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의 밀담] 중립국 스웨덴, 전시 매뉴얼 배포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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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북ㆍ미 정상회담 개최 후보지 중 하나로 꼽혔던 스웨덴은 북유럽의 영구 중립국이다. 19세기 비동맹 중립정책을 채택한 뒤 단 한 번도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전쟁과는 거리가 먼 스웨덴 정부가 요즘 전국 480만 가구에 위기대응 매뉴얼을 나눠주느라 바쁘다.

핀란드군과 합동으로 도시전 훈련을 하고 있는 스웨덴군. [사진 reddit]

핀란드군과 합동으로 도시전 훈련을 하고 있는 스웨덴군. [사진 reddit]

지난 21일부터 스웨덴민간비상국(Swedish Civil Contingencies Agency)이 발송하고 있는 매뉴얼의 제목은 ‘위기나 전쟁이 일어나면(If Crisis or War Comes)’이다. 스웨덴어판과 영어판 이외 이민자와 외국인을 위해 13개 외국어판이 별도로 나올 예정이다.

우승엽 도시재난연구소 소장은 “제목에 ‘위기’와 함께 ‘전쟁’을 넣었는데, 한국이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며 “지난해 한반도 위기가 가장 높을 때도 한국 정부는 전쟁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걸 꺼렸다. 오히려 영구 중립국인 스웨덴은 전쟁을 가정한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 대조적”이라고 설명했다.

스웨덴민간비상국 위기대응 매뉴얼 표지.

스웨덴민간비상국 위기대응 매뉴얼 표지.

20페이지짜리 소책자 형식의 매뉴얼은 간단하지만, 내용은 충실하다는 게 우 소장의 평가다. 전쟁뿐만 아니라 자연재해, 테러에서의 대처법을 알려주면서 가짜뉴스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리고 매뉴얼은 비상식량으로 보관이 편하고 먹기도 편한 토르티야, 발라먹는 치즈, 인스턴트 으깬 감자, 렌틸콩 조리제품, 과일즙(퓌레), 스파게티 소스 등을 추천했다. 뚜껑이 있는 양동이, 라디오, 물티슈, 중요 전화번호 목록 등을 꼭 챙겨야 할 품목으로 제시했다.

스웨덴의 위기대응 매뉴얼은 냉전이 한창이었던 1961년에 나온 게 마지막이었다. 57년 만에 개정판을 만든 이유는 뭘까.

위기대응 매뉴얼에선 “스웨덴이 다른 많은 나라보다 안전하기는 하지만 안보와 독립에 대한 위협은 여전히 존재한다”며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는 우리가 매일 지키고 보강해야 할 가치”라고 강조했다. 매뉴얼은 어떤 국가나 집단이 스웨덴을 위협하는지는 적지 않았다.

스웨덴의 안보를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러시아 

그러나 영구 중립국인 스웨덴을 바짝 긴장하게 한 상대가 러시아라는 것은 상식이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2014년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침공한 뒤 강제로 병합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러시아 도발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Su-57 시제기 앞을 걸어가고 있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사진 러시아 국방부]

Su-57 시제기 앞을 걸어가고 있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사진 러시아 국방부]

김태한 국립외교원 교수는 “러시아는 친서방 노선을 버리고 옛 소련과 같은 강대국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무력을 과시하고 있다”며 “특히 스웨덴은 러시아와 역사적으로 라이벌 관계”라고 말했다. 북유럽의 맹주인 스웨덴은 신흥제국 러시아와 18세기부터 3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박재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중립국으로서 스웨덴의 지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러시아 사이 힘의 균형에 달려 있다”면서 “최근 미국의 유럽 방위 공약이 흔들리고,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려 하면서 러시아가 더 유리한 상황이다. 그러면서 스웨덴의 근심이 더 늘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2014년 다국적 연합 공군훈련인 레드플랙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찾은 스웨덴 공군의 그리펜. 이 전투기는 스웨덴 이외 남아공, 체코, 헝가리, 태국, 브라질에도 수출됐다. [사진 미 공군]

2014년 다국적 연합 공군훈련인 레드플랙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찾은 스웨덴 공군의 그리펜. 이 전투기는 스웨덴 이외 남아공, 체코, 헝가리, 태국, 브라질에도 수출됐다. [사진 미 공군]

스웨덴은 영구중립국이지만 나름 자주국방을 이룬 나라다. 국산 전투기를 꾸준히 개발했으며, 최신 JAS 39 그리펜 전투기는 해외로 수출됐다. 스웨덴은 고틀란드급 잠수함을 호주에 수출했고, 보병전투차량(장갑차)인 CV-90은 베스트셀러다.

하지만 냉전 이후 위협이 사라졌다고 판단한 스웨덴 정부가 국방비를 크게 줄이고 2010년 징병제마저 폐지하면서 스웨덴군은 옛 모습을 잃었다. 1995년까지만 하더라도 15개 여단을 보유하던 스웨덴 육군은 2010년 2개 대대로 줄었다. 대대적인 군축을 거친 스웨덴군은 스웨덴을 지키기보다는 유엔의 평화유지활동(PKO)에 나가는 군대로 바뀌었다. 현재 전체 병력 2만1875명, 탱크 120대, 항공기 206대, 함정 63척을 보유하고 있다(글로벌파이어파워).

안보 불감증을 일깨운 두 건의 사건들 

그런데 스웨덴은 냉전이 끝난 뒤 누렸던 평화의 기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위기감을 갑자기 느끼게 됐다. 두 건의 사건을 겪으면서 러시아의 위협이 현실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2013년 3월 29일(현지시간) 한밤 중 러시아 공군의 Tu-22 백파이어 폭격기 2대가 Su-27 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며 발트해에서 훈련을 벌이고 있었다. 스웨덴군은 늘 있는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러시아 공군기 6대는 스웨덴 영해 30~40㎞ 가까이 접근했다.

2013년 스웨덴 영공 가까이 다가간 러시아의 폭격기 Tu-22M 백파이어. [사진 Dmitiry Pichugin]

2013년 스웨덴 영공 가까이 다가간 러시아의 폭격기 Tu-22M 백파이어. [사진 Dmitiry Pichugin]

깜짝 놀란 스웨덴 공군은 긴급출격에 나섰지만 정작 전투기 한 대도 띄우지 못했다. 원래 2대의 그리펜 전투기가 긴급출격용으로 지정됐지만, 그날 밤 준비된 전투기와 조종사는 없었다. 다급한 스웨덴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ㆍNATO)에 SOS를 쳤다. 리투아니아에 임시배치된 나토군 소속 덴마크의 F-16 2대가 출동했지만 이미 늦었다.

스웨덴 공군은 냉전 시대 400대가 넘는 전투기 부대를 보유했지만, 현재 72대에 불과하다. 예산이 많이 깎이면서 방공망에 구멍이 뚫렸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나토는 2016년 보고서에서 당시 러시아가 스웨덴 남부의 군 기지와 수도 스톡홀름 외곽의 정보기관으로 추정되는 목표물을 향해 모의 핵공격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2014년 스웨덴 영해에서 발견된 괴선박. 오른쪽 위 네모가 확대한 모습이다. [사진 스웨덴 국방부]

2014년 스웨덴 영해에서 발견된 괴선박. 오른쪽 위 네모가 확대한 모습이다. [사진 스웨덴 국방부]

1년 후인 2014년 10월 16일(현지시간) 스웨덴 정보부는 영해에서 조난신호를 포착했다. 다음 날 스웨덴 민간인이 괴선박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었다. 괴선박은 국적불명의 잠수함으로 추정됐다. 스웨덴군은 냉전 이후 최대 규모의 수색작전을 진행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러시아는 모든 사실을 부인했다. 스웨덴 정부는 잠수함이 출현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5년 만에 징병제 부활, 여자도 징집 대상 

그런데 또 1년이 지난 2015년 7월 27일 스웨덴의 수중수색회사인 오션엑스는 영해 해저에 좌초된 외국 잠수함을 발견했다. 선체에는 러시아의 키릴 문자가 적혀 있었고, 신형 잠수함으로 보였다고 한다. 이 잠수함이 1년 전 조난신호를 보낸 러시아 잠수함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나 스웨덴 정부는 이번에도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러시아는 지난달엔 스웨덴 남부 칼스크로나 군도 인근 지역에서 미사일 발사 훈련을 실시한다고 통보했다.

스웨덴 신병 훈련소의 점호. 여성 신병(왼쪽 둘째)도 보인다. [사진 스웨덴 국방부]

스웨덴 신병 훈련소의 점호. 여성 신병(왼쪽 둘째)도 보인다. [사진 스웨덴 국방부]

이처럼 러시아가 막무가내로 나가자 스웨덴 정부는 국방비를 대폭 늘리고, 올해 징병제를 부활시켰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

전통적인 비동맹 중립정책도 수정됐다. 스웨덴은 2016년 6월 미국과 안보협력협정을 맺었다. 또 스웨덴 영토 안에서 나토군의 훈련을 허용하는 내용의 주둔군 지원협정도 체결했다. 스웨덴 내부에선 나토에 가입하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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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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