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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 맥짚기] 예고된 위기는 오지 않는다

중앙일보

입력

금융위기 10년 주기설 거론…신흥국 대응능력 향상돼

아르헨티나가 국제통화기금(IMF)에 300억 달러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사진은 지난 5월 11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환전소 앞의 모습.

아르헨티나가 국제통화기금(IMF)에 300억 달러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사진은 지난 5월 11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환전소 앞의 모습.

위기설은 경제가 전환점을 넘을 때마다 나온다. 지난 5년 사이에도 그런 상황이 두 번이나 벌어졌다. 한 번은 2013년 미국이 출구전략을 시작한 때이고, 다른 한 번은 2015년 러시아와 브라질의 환율이 급락했을 때였다. 둘 다 불확실한 상황으로 공포심이 커진 게 원인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위기가 발생한 2000년이나 2008년에는 위기설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IT버블 붕괴와 미국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낙관적 전망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위기는 모두가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발생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6월에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국제 금리 상승으로 신흥국에서 돈이 빠져 나갈 가능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페소화의 하락을 막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에 대기성 차관을 요청하면서 위기 가능성이 힘을 얻었다. 여기에 정치적 불안으로 터키 리라화 가치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하락하고, 브라질 헤알화 절하가 더해지면서 위기가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위기설은 자금 흐름도 바꿔놓았다. 5월 들어 이머징 마켓 주식형 펀드와 채권형 펀드에서 30억 달러 가까운 돈이 빠져 나갔다. 위기가 현실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액수였다.

美 금리 인상과 달러 강세로 신흥국에서 자금 이탈

신흥국 위기설의 진원지는 선진국, 특히 미국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가 금리를 올리고 유동성 회수에 나서면서 신흥국에서 자금이 빠져 나갈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금리 인상이 수 년 전에 시작됐지만 그동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달러 가치가 약세여서 미국이 금리를 인상해도 돈이 이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월 들면서 이런 상황이 바뀌었다. 달러가 강세가 돼 이머징 마켓에서 자금이 빠지는 걸 막을 방법이 없어졌다. IMF에 따르면 신흥국 금융환경 변화의 3분의 1 정도는 미국의 금융정책에 따라 좌우된다고 한다. 그만큼 이번 연준의 정책 변경이 신흥국 금융시장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된다. 4월에 미국의 실업률이 3.9%로 떨어졌다. 1990년대 10년 간 이어진 호황 때도 미국의 실업률이 4%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미국 고용시장이 다른 어느 때보다 좋은 상태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물가는 우려와 달리 2% 초반을 유지하고 있다. 연준 입장에서 보면 목표로 했던 완전 고용과 물가 안정 모두를 달성하고 있는 셈이 된다. 금리 인상을 가로막는 요인이 사라진 만큼 연준이 금리 인상을 주저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어려운 상황에도 신흥국에서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신흥국의 대응능력이 과거에 비해 향상됐기 때문이다. 지금 신흥국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나 2013년 미국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 때보다 좋아졌다. 당시는 미국만 위기에서 벗어났을 뿐 유럽은 재정위기에, 일본은 지진과 만성적인 경기 둔화에 시달려 국제 금융시장에서 발생하는 리스크를 이머징 국가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금리 인상에 대한 경험도 다르다. 2013년에는 어떤 나라도 금리 인상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수 년 간 미국이 금리를 올리는 걸 경험한 상태다. 대응능력이 높아진 만큼 금리 인상에 대한 두려움이 약해졌다.

금융위기 이후 10년 간 전 세계 부채가 50% 가까이 늘었다. 특히 신흥국 부채 증가율이 200%를 넘을 정도였다. 선진국 부채 증가율(28%)보다 8배 이상으로 높다. 여러 부문 중에서 신흥국 기업의 부채 증가가 특히 컸다. 금융위기 직후 높은 원자재 가격에 매료된 신흥국 기업들이 돈을 빌려 석유 등 천연자원 개발에 나섰기 때문이다. 만약 위기가 발생한다면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에서 20달러대로 떨어진 시점이 적기였을 것이다. 빌려서 투자한 돈이 손실만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신흥국에서 위기가 발생하지 않았다. 대응능력이 향상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에 주요 12개 이머징 국가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외환보유액이 167%로 높아졌다. 신흥국에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선진국이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외환보유액을 늘린 결과다.

최근에 신흥국 주가가 하락했다. MSCI 신흥국지수가 연중 최고점 대비 10% 넘게 하락할 정도였다. 경제에서 특별한 이상징후를 찾을 수 없고, 올해 이익이 12% 넘게 증가할 걸로 전망되는 점을 고려할 때 조만간 신흥국 주가가 반등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 이후다. 신흥국에서 경제위기 발생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사실이 높은 투자 수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여러 사정을 감안할 때 5월에 시작된 선진국과 신흥국의 주가 역전 현상이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발표된 경제지표가 시장의 전망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평가하는 지표가 있다. 이른바 경제 서프라이즈 지수(ESI)다. 미국은 꾸준히 (+)권을 유지하고 있다. 실제 발표치가 시장 전망보다 높게 나오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에도 미국의 실물경기가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4월 물가지표 발표를 계기로 미국 채권시장에서 인플레 기대심리가 낮아진 대신 소비가 경제의 중심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흥국 중에서 미국보다 경제 상황이 좋은 곳은 찾기 힘들다. 불안이 줄어든 이머징 마켓보다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선진국 주식시장이 더 유망하다. 주가가 낮을 때에는 둘의 관계가 뒤바뀌기도 하지만 가격이 높아지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당분간 신흥국보다 선진국 시장이 높은 수익률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선진국 시장 강세로 IT 투자에 힘 실려

투자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는 투자 대상을 선택하는 데에서도 중요한 문제다. 선진국이 중심이 될 경우 브라질 국채를 포함한 신흥국 채권은 4분기까지 투자를 미뤄야 한다. 최근에 헤알화 대비 원화 환율이 300원 밑으로 내려왔다. 2015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브라질 국채의 매력이 높아졌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향후 정치 일정을 고려할 때 헤알화의 추가 하락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다. 아르헨티나의 긴급 자금 신청을 계기로 남미 전체에 외환위기가 번질 가능성도 지켜봐야 한다. 차이나 펀드도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난 3년 간 상하이 주식시장은 3000선을 저점으로 소폭의 등락을 거듭해왔다. 같은 기간 선진국 시장이 두 배 가까이로 상승한 걸 감안하면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이에 비해 선진국 펀드는 강세를 이어갈 걸로 전망된다. 여러 선진국 지수를 결합한 파생상품 역시 높은 수익을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

선진국 시장 우위 현상은 투자 종목에도 영향을 미친다. IT종목이 재부상해 바이오 중심으로 짜여 있는 기존 투자패턴이 바뀔 수 있다. 4월 한 달 미국 주식시장은 여러 악재에 시달렸다. 테슬라의 파산 가능성과 페이스북의 보안 문제가 대표적이다. 그 때문에 나스닥이 특히 크게 하락했다. 5월 들어 악재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데 여기에 애플 등 IT 대표 기업의 양호한 실적이 더해질 경우 기술주 상승이 빨라질 수 있다.

우리 IT기업 입장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1분기 국내 기업의 실적 발표가 마무리되고 있다. IT를 제외하고 인상적인 이익을 올린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반도체의 독무대였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투자자들은 실력이 뒷받침되는 기업에 몰린다. 시장 이상의 수익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반도체의 높은 이익이 다른 IT기업으로 확산되는 때가 IT가 주도주로 본격 부상하는 시점이 될 것이다.

이종우 증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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