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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무 회장 한마디에···축제 된 '女프로골프 프로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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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더,오래] 민국홍의 19번 홀 버디(4)

최근 소천한 LG그룹 구본무회장. [중앙포토]

최근 소천한 LG그룹 구본무회장. [중앙포토]

최근 소천한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한국 골프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진 에피소드가 있었다. 가슴이 따뜻하고 소탈한 구 회장은 골프에서 정도를 추구했고 매너와 에티켓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2005년 5월 그룹 사장단회의에서 “한국 여자 프로골퍼들은 에티켓 기본이 안 됐어”라고 한마디 말을 툭 뱉었다. 그의 말 한마디가 전통의 여자프로골프대회 하나를 사라지게 하였고 KLPGA(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투어를 오늘날 미국의 LPGA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골프투어의 반열에 도약하도록 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구 회장, 동반 플레이한 여자 프로골퍼에 실망

때는 2005년 어느 날로 돌아간다. 구 회장은 이날 저녁 서울 근교의 한 골프장 야외에서 석양을 배경으로 열린 X캔버스 여자프로골프대회의 프로암 만찬 행사에서 속상한 표정이 역력했다. 오전 동반 플레이를 했던 여자 프로골퍼한테 엄청나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이웃집 아저씨처럼 마음이 푸근하고 다른 사람한테 인상을 찡그리는 법이 없던 그가 왜 그랬을까?

기업 경영에서도 인간의 기본자세를 중시하는 구 회장은 골프에서 매너를 매우 중시했다. 사실 골프는 남을 배려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한 매너와 에티켓의 운동이다.

그는 이날 LG전자의 여자프로골프대회 전날 열리는 프로골퍼와의 프로암대회에 참석했다. 프로암대회는 대회를 주최하는 스폰서가 자기회사의 고객을 초청해 대회 참가 유명 선수들과 같이 라운드를 돌고 만찬도 함께 하는 일종의 사교 행사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프로선수와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이고 선수나 프로골프협회에서는 기업인이나 사회 저명인사와 관계를 맺고 스폰서를 유지하고 확대할 좋은 기회가 되는 자리다.

구 회장에게는 그 당시 LPGA 투어에서 활동하다 초청 선수로 귀국한 선수가 동반플레이어로 됐다. 그런데 문제는 티오프가 되자마자 곧 발생했다. 이 선수가 친교의 장이 돼야 할 프로암 동반 라운드를 자신의 연습라운드로만 인식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 선수의 눈에는 구 회장이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오랜만에 찾은 골프장의 상태와 자신의 샷 점검만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미국인 캐디와 그린 공략을 위해 이야기하느라 구 회장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객들이 프로암행사장에 들어와 등록하고 있다. [사진 민국홍]

고객들이 프로암행사장에 들어와 등록하고 있다. [사진 민국홍]

선수는 내내 그린에 올라가면 재계 지도자급인 동반플레이어를 의식하지 않고 몇 번이나 본인의 퍼팅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구 회장이 자신의 차례가 돼 퍼팅하려고 할 때도 눈앞에서 퍼팅연습을 해 시야를 번거롭게 했다. 구 회장이 참으로 민망했던 모양이다.

구 회장은 그래도 그 선수가 어리고 우승 욕심으로 연습에 열중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참았단다. 18번 홀을 끝내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올 때 준비했던 선물을 주면서 덕담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선수는 카트에서 내리자마자 구 회장에게 “잘 쳤어요”라고 한마디 하곤 퍼팅 연습장으로 총총걸음을 옮겼다. 선물조차 건네지 못한 그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구 회장이 작심하고 한국 여자골퍼는 매너를 더 갖추어야겠다고 따끔하게 말했고 바로 이것이 이듬해 대회가 없어진 배경이다. 베이징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의 폭풍을 부르는 법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여자프로골프협회는 두 달 뒤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여자 프로골퍼의 프로암 매너를 갖추도록 프로암 행사 시 골프장에서 마련된 캐디 이외에 선수의 캐디가 라운드에 참석할 수 없도록 한 규정을 이사회에서 통과시켰다. 한국만의 대회 요강이 됐다.

‘골프 대디’ 프로암 대회 참가 금지

대회 주최측인 S오일이 만찬식장에서 초대한 고객을 상대로 시상식을 하고 있다. [사진 민국홍]

대회 주최측인 S오일이 만찬식장에서 초대한 고객을 상대로 시상식을 하고 있다. [사진 민국홍]

실은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 선수 캐디는 골프 대디였고 미국 LPGA에 진출한 선수의 캐디는 영어만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프로암 라운드는 모습이 이상했다. 선수들은 연습만 하는 가운데 아빠 캐디와 영어 쓰는 캐디가 주인이고 초청 인사는 객이 되는 진풍경이었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 여자프로 골퍼의 매너는 너무도 달랐다. 그해 11월 나는 KLPGA 회장이었던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을 대신해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미국 LPGA 미즈노 대회의 프로암에 초대돼 세계적인 프로골퍼 미야자토 아이와 동반라운드를 했다. 대회 방식은 플레이어가 각자 드라이버 샷을 한 뒤 동반플레이어의 샷 중 가장 좋은 샷을 선택해 치는 스크램블 방식이었다.

나는 그가 숲속으로 들어가 프로암에 초대된 고객의 공을 찾아주는 것을 보고 놀랐다. 더욱이 파 3홀에서 내 공이 온 그린 되었지만 자신의 공이 벙커로 들어가자 벙커 연습을 하지 않고 공을 집지 않는가. 미야자토 아이 선수는 참으로 스폰서를 배려하는 선수였다.

구 회장 사건 뒤로 여자프로골프협회의 프로암 행사는 엄청나게 발전했다. 선수들이 자신의 연습라운드가 아니라 스폰서를 즐겁게 해주는 행사로 변모했다. 이전에 프로암 라운드가 끝나면 선수들은 연습장으로 가 퍼팅연습을 하다 땀에 푹 젖은 모습으로 만찬 행사장에 돌아와 스폰서 초청 고객과 저녁을 같이 했다.

‘구 회장 사건’ 후 프로암 대회 큰 발전

선수와 고객들이 저녁을 하면서 공연을 보고 있다. [사진 민국홍]

선수와 고객들이 저녁을 하면서 공연을 보고 있다. [사진 민국홍]

지금은 모두 다 라운드가 끝나면 샤워 후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친 뒤 정장 차림의 숙녀가 되어 만찬에 나온다. 이러다 보니 홍란 프로 같은 행사의 여왕이 탄생하기도 한다. 누구나 다시 한번 함께 치고 싶을 정도로 행복한 동반 플레이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여자프로골프협회의 프로암은 대기업과 금융계에서 큰돈을 들여서라도 꼭 하고 싶은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물론 여자대회가 많이 늘었고 여자투어가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하늘나라에 간 구 회장이 이런 일이 소용돌이처럼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LG그룹은 이런 의미에서 없어진 골프대회를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하나쯤 부활시키면 어떨까 싶다. 고인이 좋아하지 않을까.

민국홍 KPGA 코리안투어 경기위원·중앙일보 객원기자 minklpg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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