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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말리는 한국인의 자녀교육열, 이민 와서도 학벌 집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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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주호석의 이민스토리(13)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딸을 위해 예술전문학교가 있는 밴쿠버 랭리(Langley)에 정착한 A씨 가족. [사진 freepik]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딸을 위해 예술전문학교가 있는 밴쿠버 랭리(Langley)에 정착한 A씨 가족. [사진 freepik]

필자와 비슷한 시기에 이민을 온 A 씨 가족은 처음에 밴쿠버 랭리(Langley)라는 곳에 정착했습니다.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딸을 위해서였습니다. 즉 딸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 고등학교 과정 예술전문학교가 있는 지역에 정착한 것입니다. 정착지역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최우선 순위가 딸의 미술공부에 적합한 곳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가족이 이민을 오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 역시 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한국에서는 미술대학 입학이 타고난 재능보다 다른 요인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현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면 밴쿠버에서 유명한 미술대학인 에밀리카(Emily Carr University of Art and Design)에 진학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과정에서 특출한 재능을 선보여 실력을 인정받은 그 딸이 마음을 바꿔 뉴욕에 있는 유명한 파슨스(Parsons School of Design)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세상으로 진출한 것이지요.

자녀 학비 마련 위해 추운 소도시로 이사  

명문 미술대학에 입학한 딸의 학비를 해결하기 위해 밴쿠버를 떠나 앨버타주 소도시로 이사한 A씨의 가족. [사진 캐나다관광청]

명문 미술대학에 입학한 딸의 학비를 해결하기 위해 밴쿠버를 떠나 앨버타주 소도시로 이사한 A씨의 가족. [사진 캐나다관광청]

명문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니 집안에 경사가 났습니다. 문제는 그 가정이 경제적으로 썩 넉넉한 처지가 못 되는데 학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우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밴쿠버를 떠나 앨버타주 소도시로 이사한 것입니다. 날씨가 사철 온화한 밴쿠버와 달리 그곳은 긴 겨울 동안 기온이 영하 30~40도씩 내려가는 춥고 삭막한 곳입니다.

한국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그 집 가장은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육체노동을 하면서 딸의 학업을 지원했습니다. 부모의 헌신과 그 딸아이의 굳은 의지와 피나는 노력이 결실을 보아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대학원까지 마치고 미국 텍사스 주 모 대학의 교수가 됐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의사 신랑을 만나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부모도 무척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자식이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위에 예를 든 A 씨와 같이 ‘비록 나는 이 고생을 하면서 이민생활을 하지만 내 자식만 잘될 수 있다면야 무슨 고생이라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민자가 많습니다. 자식의 성공이 바로 이민생활의 성공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물론 한국을 떠나온 이민자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 겁니다. 자식이 성공해야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다고 믿는 것은 한국에 사는 부모들이라 해서 다를 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이민자의 경우 자식에 대한 기대가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 이민자의 삶이 고달프기 때문입니다. 특히 학력이 높은 한인 이민자의 경우 한국에서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나 남부럽지 않게 살던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직업을 굳이 구분하자면 한국에서는 대개 화이트칼라였죠. 그런 사람이 이민 와서는 블루칼라가 되어 낮은 보수에 힘들고 고된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게 보통입니다. 한국에서 감히 상상조차 못 했던 궂은일을 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민자들 중 자식의 성공이 고생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중앙포토]

이민자들 중 자식의 성공이 고생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중앙포토]

사람은 고생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어하는 게 인지상정이지요. 돈이든 지위든 아니면 정신적인 그 무엇이든 말입니다. 그런데 이민자들은 고생하더라도 돈이나 지위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 성공이 고생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식이 유일한 희망이고 자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뜻이지요.

다행히 한인 가정의 아이들이 대부분 머리도 좋고 공부를 잘하는 편입니다. 그런 재능과 부모의 헌신이 밑거름되어 한인 자식들 가운데 의사나 변호사 약사 같은 고소득 전문직에 진출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자식을 둔 부모는 아무리 어려운 일을 하며 살더라도 언제나 얼굴이 밝고 남들 앞에서 당당합니다.

그렇다고 한인 이민자의 자식들이 모두 부모의 기대에 부응할 정도로 잘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필자의 주변에서도 자식의 학업이나 사회진출문제로 심하게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을 적잖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 아이 자신보다도 부모의 고정관념과 캐나다 사회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벌보다는 개인 능력 중시하는 캐나다 사회 

무엇보다 한국과 캐나다 간에 확연히 다른 학벌에 대한 인식문제입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입니다. 반면에 캐나다는 학벌에 의해 개인의 성공과 실패가 크게 좌우되지 않습니다. 물론 학벌이 전혀 가치 없는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학벌 같은 백그라운드보다는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사회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자 가정의 부모 중에는 자식의 적성이나 능력 등을 무시한 채 명문대학을 졸업해야 한다는 한국식 고정관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물론 아이가 능력과 재능을 타고 난 경우엔 명문 대학에 들어가는 게 지극히 당연하겠지요. 문제는 아이의 능력이 그렇지 못한데도 부모가 굳이 한국식으로 학벌을 고집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캐나다에는 아이들 각각의 적성에 맞게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전문학교가 많이 있습니다. 밴쿠버에 있는 BCIT(British Columbia Institute of Technologe) 의 경우 350여 개에 달하는 무척 다양한 분야의 직업교육을 하는 전문대학인데, 고교졸업생은 물론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까지도 취업을 위해 다시 입학해 공부하는 곳입니다.

벤쿠버에 있는 직업교육 전문대학 BCIT(British Columbia Institute of Technologe). [사진 BCIT홈페이지(https://www.bcit.ca/) 화면 캡처]

벤쿠버에 있는 직업교육 전문대학 BCIT(British Columbia Institute of Technologe). [사진 BCIT홈페이지(https://www.bcit.ca/) 화면 캡처]

일부 전공과목은 입학을 위해 몇 년씩 대기할 정도로 인기 있는 대학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대학 디플로마 과정 졸업생의 취업률이 무려 96%에 달합니다. 최근 들어 한인 학생들도 BCIT에 입학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한국 부모들의 명문대학에 대한 집착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캐나다에 살면서도 아이를 캐나다의 교육시스템이나 사회시스템에 적응시키려 하기보다 한국식으로 교육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는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심지어 자식이 음악이나 미술 등 예체능 분야에 특출난 재능을 타고났는데도 그 재능을 살리지 않고 무조건 명문대학의 소위 간판이 그럴듯한 학과에 진학시키려 하는 부모가 적지 않습니다. 결국 아이가 중간에 학업을 포기한 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례를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캐나다에는 그런 예능 분야의 전문 대학들이 많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재능 살려주는 게 자식 성공의 길 

부모로서 모두가 바라는 자식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공의 기준 자체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민자로서 필자가 생각하는 자식 성공은 자식이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즐겁게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학벌이나 직업의 귀천을 크게 따지지 않는 캐나다에서 자식이 무슨 일을 하든 자기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게 성공한 자식이고 그런 자식을 둔 부모가 바로 성공한 이민자 아닐까요.

주호석 밴쿠버 중앙일보 편집위원 genman2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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