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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구본무의 20분 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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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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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5년 전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 미숙한 딸에게 아버지는 딱 세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첫째, 무슨 일이든 남들보다 15분 먼저 서둘러라. 둘째, 주위 사람들에게 밥을 많이 사라. 그땐 심오한 가르침이기는커녕 평범하다 못해 하나 마나 한 얘기처럼 생각됐다. 무엇보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을 뭘 그리 힘줘서 말하나 싶었다. 이게 단순히 ‘시간과 돈의 문제’가 아니라 ‘일과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직결된다는 걸 깨닫게 되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깨달음과 실행은 또 전혀 다른 얘기라는 건 더 나중에야 알게 됐다.

비록 쉽지 않았지만 이 두 가지는 얼추 따라 하는 시늉은 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아버지의 세 번째 당부는 당시엔 마음속으로 동의할 수 없었고, 그 뜻을 헤아린 이후엔 흉내조차 못 내고 있다. 바로 ‘손해 보고 살아라’는 말이다. 오히려 사소한 일에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아등바등 산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제 와서 새삼 아버지의 조언을 떠올린 건 지난 5월 20일 별세한 구본무 LG 회장이 남긴 숱한 미담 중 하나인 ‘20분 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 식사 대접하기를 즐겼던 구 회장은 무슨 자리든 상대가 누구든 늘 20분 먼저 도착해 상대를 기다리는 ‘20분 룰’을 만들어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미투운동 여파로 한동안 시끌시끌했던 펜스룰(직장에서 업무·회식 등에 여성을 배제하는 방식)처럼 세상의 많은 룰이 대개는 혹시 내가 손해 볼까 싶어 미리 방어막을 치는 용도로 쓰인다. 하지만 구 회장의 20분 룰은 정반대다. 거꾸로 내 시간을 손해 봐서라도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보여주는 징표로 삼았다.

20분 룰만이 아니라 다른 일화를 봐도 구 회장의 ‘스스로 손해 보는 삶’이 잘 드러난다. “편법이 필요악”이라는 영업부서의 볼멘소리에 “부정한 방법으로 1등을 할 거면 차라리 2등을 하라”고 호통을 쳤다거나, 신임 임원들에게는 “갑을관계는 없다”며 “협력사의 성장이 우리의 성장”이라고 일러 실천을 끌어냈다는 얘기가 들린다. 정도(正道) 경영을 외치고 상생(相生)을 부르짖기는 쉬워도 실천하는 기업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수익 극대화니 뭐니 여러 이유를 내세우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나만 손해 볼까 싶은 조바심에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탓이다. 비단 기업가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편법을 동원하고는 나만 손해 볼 수는 없지 않느냐며 자기 합리화를 한다. 손해 보는 게 결코 손해 보는 삶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 구 회장의 영면을 빈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