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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잃어버린 1년, 남은 4년도 잃어버리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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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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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가 1776년 『국부론』을 쓰기 이전에 경제는 신(神)이 지배하는 영역이었다. 종교와 도덕은 인간의 탐욕을 억제하라고 가르쳤다. 이자와 이윤은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사악한 행위로 비난받았다. 스미스는 이런 인간의 탐욕을 종교의 틀에서 해방시켰다. 인간 본능에 따라 이기적으로 행동해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자연스럽게 가격이 결정되고, 그 길을 따라 국가의 부(富)가 효과적으로 증가한다고 했다. 근대 경제학은 시장에 대한 믿음과 자유 경쟁을 두 기둥으로 삼고 있다.

소득주도성장 실험은 실패했다 #시장 통제가 시장의 역습 불러 #공정·형평 등 윤리적 단어보다 #시장·효율·국제 경쟁력 같은 #경제학 용어부터 복권시켜야

요즘 청와대에서 나오는 경제 용어에 마음이 쓰인다. 경제학 교과서의 시장, 효율, 자유경쟁, 국제 경쟁력 같은 단어들이 싹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빈자리를 공정, 형평, 민주화, 정의 같은 윤리학 용어들이 차지했다. 가격만 해도 그렇다. 가격은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청와대는 슬그머니 ‘가격=원가+적정 이윤’으로 둔갑시켰다. 이 프레임을 통신 요금, 치킨값, 주택 분양가에 강제하면서 착한 가격, 합리적 가격이란 형용사까지 붙였다. 경제학을 다시 애덤 스미스 이전의 시대로 돌려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영업이익률이 26%인 애플은 소비자를 착취하는 나쁜 기업일까. 반도체 영업이익률이 55.6%나 되는 삼성전자는 값을 깎아줘야 하는가.

최근 가장 고약한 건 청와대 일자리수석의 발언이다. 전년 동기 대비 일자리가 10만 개밖에 늘어나지 않았는데 “사실 일자리는 계속 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 경제 체력에선 3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늘어나야 정상이다. 미국은 매년 160만 개의 신규 일자리를 고용지표의 기준으로 삼는다. 만약 청와대 논리대로라면 일본이 “과거 20년간 실제 역성장한 1998, 99, 2008, 2009, 2011년을 제외하곤 0.몇%라도 성장했으니 잃어버린 5년”이라 우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철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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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0년 전인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신규 일자리가 11만2000개 증가에 그친 적이 있었다. 당시 야당과 진보 언론들은 이명박 정부를 가혹하게 비난했다. “늘어나는 경제활동인구를 흡수하려면 매년 40만 개의 새 일자리가 필요하다. 참여정부도 30만 개 수준은 유지했다. 대선 때 60만 개를 공약하더니 왜 11만 개밖에 못 만드는가.”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국회 연설에서 “이명박 청와대는 국정과 내각을 전면적으로 쇄신하라”고 몰아붙였다. 지금은 공수의 위치만 바뀌었는데 청와대는 똑같은 일자리 통계를 놓고 ‘내로남불’이다.

지난 1년 소득주도 성장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아름다웠던 정치 구호는 경제 현장에서 변질된 지 오래다. “사람이 먼저다”는 “사람이 겁난다”로 바뀌었다. 60세 정년까지 해고를 못 하니 아예 고용을 기피하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는 반(反)시장·반기업·친노조의 상징이 됐다. 일자리를 위한 최저임금 인상, 정규직화, 근로시간 단축 등이 생산비용을 급등시켜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과도한 시장 통제는 시장의 역습을 부르기 마련이다. 요즘 집 부근 편의점에 낯선 종업원이 등장했다. 한국말이 서툰, 인근 대학의 중국 유학생이다. 가게 주인이 최저임금이 치솟자 인건비 부담과 4대 보험을 피해 값싼 유학생을 불법 고용한 것이다. 이처럼 가격(임금)을 인위적으로 건드리면 수요(일자리)가 왜곡되면서 이중 시장이 생겨난다. 애꿎은 한국 대학생 알바 자리만 날아갔다.

지난 한 해는 ‘잃어버린 1년’이 됐다. 이대로 가면 남은 4년도 장담 못 한다. 여기에다 금리·원화가치·국제유가가 오르는 ‘신 3고’ 환경이 펼쳐지고 있다. 금리가 오르면 가계부채 부담이 가중되고 소비 여력은 위축된다. 환율은 이미 반도체를 제외하면 수출 채산성을 맞추기 어려운 수준이고, 유가도 배럴당 80달러의 깔딱고개에 올라섰다. 경제 전망 기관들은 “경기 침체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청와대는 한사코 이런 진단을 외면한다. 그래야 소득주도 성장 실험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내부에선 경쟁력 강화나 노동개혁은 말도 못 꺼내는 분위기라고 한다. 하지만 반도체 수퍼 호황의 신기루가 사라지면 머지않아 한국 경제의 민낯이 드러날 것이다. 이대로 가면 언제 경제위기나 대량 실업의 재앙을 맞을지 모른다. 얼치기 경제 실험을 버텨낼 체력도 고갈되고 있다. 더 이상 잃어버린 경제가 되지 않으려면 잃어버린 표현부터 되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한국을 만든 시장, 효율, 자유경쟁, 국제 경쟁력 같은 단어가 그것이다.

이철호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