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원의 심스틸러]“얘 누구냐” 설움 딛고 선 반전있는 그녀

중앙일보

입력 2018.05.19 08:00

업데이트 2018.05.19 15:42

지난 3일 열린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자신인연기상을 수상해 소감을 말하고 있는 최희서. [일간스포츠]

지난 3일 열린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자신인연기상을 수상해 소감을 말하고 있는 최희서. [일간스포츠]

신인상 수상자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말 그대로 ‘신인’이기 때문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시상대에 올라도 “얘는 누구냐”는 시선을 받기 일쑤인 탓이다. 배우 최희서(31)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영화 ‘박열’로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과 신인여우상을 동시에 거머쥔 데 이어 청룡영화상에서 신인여우상을 받았지만, 인지도가 단숨에 뛰진 않았다. 방송 도중 수상 소감이 길어지자 스태프가 “그만해라 얘 돌겠네 진짜”라고 말하는 소리가 고스란히 전파를 타면서 ‘막말 사건’만 유명해졌을 뿐이다. 지난 3일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자신인연기상으로 10번째 트로피를 받으면서도 눈물을 펑펑 쏟은 것 역시 그러한 연유가 아닐까.

영화 ‘박열’로 10관왕 오른 최희서
‘미스트리스’에서 정숙한 섹시 연기
강단 있는 후미코와 180도 달라
앞으로 선보일 주체적 여성상 기대

2009년 영화 ‘킹콩을 들다’로 데뷔한 그는 “지하철에서 연극 대본을 읽다가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동주’의 각본가이자 제작자인 신연식 감독의 눈에 띄게 됐다”며 “제가 지하철을 안 타거나 타서도 대본을 보고 있지 않았다면, ‘동주’도 못하고 ‘박열’도 못했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고 캐스팅 비화를 공개했다. 그리고 힘주어 말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꿈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분들”을 향해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라고. 듣고 있던 나마저 눈물이 핑 돌았다.

최희서는 영화 '박열'에서 후미코 역을 맡아 자연스러운 일본어 연기를 선보였다.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최희서는 영화 '박열'에서 후미코 역을 맡아 자연스러운 일본어 연기를 선보였다. [사진 메가박스플러스엠]

배우 최희서도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동주’에서는 윤동주의 시집 발간을 돕는 쿠미 역을 맡고, ‘박열’에서는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을 넘어 당찬 아나키스트 후미코 역으로 열연하는 바람에 그녀를 일본인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토종 한국인이다. 누가 봐도 일본인처럼 보일 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는 노력의 산물이란 얘기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화제를 모았던 ‘옥자’에서는 영어 오디션을 통과해 통역사 역할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연세대에서 영어영문학과 신문방송학을 전공, 캘리포니아대에서 공연예술을 공부한 5개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자지만 ‘엄친딸’ ‘뇌섹녀’의 범주에 놓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디션 때마다 들었던 “왜 좋은 학교 나와 연기하느냐”는 질문을 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만큼 연기 외에 다른 요소가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후미코의 자서전을 읽으며 함께 번역에 참여하고 직접 극 중 등장하는 자서전을 일일이 손으로 써서 만드는 것은 열정 없이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미스트리스'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는 한가인, 신현빈, 최희서, 구재이.(왼쪽부터 시계방향) [사진 OCN]

'미스트리스'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는 한가인, 신현빈, 최희서, 구재이.(왼쪽부터 시계방향) [사진 OCN]

그런 그녀가 차기작으로 독립영화 ‘아워 바디’를 찍고, OCN 주말드라마 ‘미스트리스’를 고른 것은 의외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자책하다 우연히 달리기에 눈을 뜨는 8년 차 고시생 자영이나 유명 셰프 남편을 두고 동료 교사와 하룻밤 실수로 임신한 한정원은 둘 다 여성의 몸이 전면에 드러나지만 단순한 섹스어필이라 하긴 어렵다. 극 중 몸과 마음을 가꾸는 일은 곧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과정이요, 교사나 아내 등 부여받은 역할이 아닌 한 인간이자 여성으로서 자아 형성과 직결된다.

‘미스트리스’ 제작발표회에서 밝힌 출연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대본이 재미도 있지만 의미도 있다”며 “스릴러지만 남성 조력자 없이 여성의 연대로 사건을 해결해가는 점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늘 여성, 그것도 주체적인 여성의 이야기가 빈곤함에 갈증을 느껴온 사람으로서 살인 사건 이후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여성이 주요 역할을 담당할뿐더러 서로 힘을 합치는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1~2회는 19금일 만큼 파격적인 베드신이 이어졌지만 남편과 아이를 갖길 원하는 부부 설정인 만큼 노출이 선택에 장애 요소가 되진 않았다.

'미스트리스'에서 교사 역할을 맡은 최희서는 남편과 아이를 갖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학교 화장실에서도 속옷 사진을 찍어보내거나 쉬는 시간에 모텔에 다녀오는 등 노력하지만 임신이 쉽지 않다. [사진 OCN]

'미스트리스'에서 교사 역할을 맡은 최희서는 남편과 아이를 갖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학교 화장실에서도 속옷 사진을 찍어보내거나 쉬는 시간에 모텔에 다녀오는 등 노력하지만 임신이 쉽지 않다. [사진 OCN]

이는 영국 BBC(2008~2010)와 미국 ABC(2013~2016)에서 방영된 원작과 가장 큰 차별화 포인트이기도 하다. 원작 드라마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4명의 여성이 친구 남편 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나는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면, 한국판은 장르물의 명가 OCN답게 스릴러를 중심으로 각색했다. 미스터리 관능 스릴러라는 이색 콘셉트와 ‘연애시대’를 연출한 한지승 PD의 조합에 지난 3월 종영한 ‘리턴’과 같은 시체를 묻기 위해 땅을 파는 장면이 등장해도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덕분에 6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한 한가인뿐 아니라 최희서ㆍ신현빈ㆍ구재이 등 여성 캐릭터가 고루 빛난다.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기보다는 사건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각기 다른 사건을 전개해 나가는 것 역시 고무적이다. 왜 영국에서는 빵집, 미국에서는 인테리어샵을 운영하던 것을 카페 주인(한가인)으로 바꾸고, 파티플래너나 부동산 중개업자가 아닌 로펌 사무장(구재이)이 필요했는지를 그들이 일하는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최희서 역할은 변호사에서 교사로 바뀌어 한국 상황을 잘 반영한다. 미국에서는 김윤진이 맡아 열연했던 신현빈 역은 3개 버전 모두 정신과 의사로 등장한다.

지난달 열린 '미스트리스'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최희서, 신현빈, 한가인, 구재이. [사진 OCN]

지난달 열린 '미스트리스'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최희서, 신현빈, 한가인, 구재이. [사진 OCN]

너무 많은 단서를 흩뿌려 놓은 탓에 시청률은 다소 아쉽다.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한가인의 남편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등 그간의 단서가 하나둘 꿰맞춰져지면서 조금씩 반등하는 추세다.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역할을 팔색조처럼 소화하고 있는 최희서를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앞으로 맞춰나갈 퍼즐이 궁금해진다. 한 역할에서 대체로 정숙한데 때로 귀엽고 간혹 섹시한 모습을 선보일 수 있다면 앞으로 보여줄 수 있는 얼굴은 더욱 많단 얘기니 말이다. 최희서라는 배우를 전 국민이 다 알게 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올곧은 필모그래피를 보건대 그날이 곧 오리라 믿는다.

민경원의 심스틸러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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