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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쇼이와 마린스키, 두 세계의 핵융합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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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호 30면

볼쇼이 발레단 내한공연 ‘백조의 호수’ 

클래식 발레단에게 ‘호두까기 인형’이 12월의 효자상품이라면, ‘백조의 호수’는 시류를 타지 않는 스테디셀러다. 마법으로 백조가 된 공주가 왕자와 사랑에 빠졌으나 악마 때문에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동화에 딱히 시류랄 게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백조의 호수’는 어느 작품보다 다양하게 해석되고 과감하게 해체되면서 무용수·안무가·발레단·정권 그리고 시대의 미학과 세계관을 반영해왔다. 볼쇼이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도 그렇다.

‘백조의 호수’는 1877년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단에서 율리우스 라이징거 안무-표트르 차이콥스키 작곡으로 초연되었으나 실패했고, 189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극장(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마리우스 프티파와 레브 이바노프의 안무로 재탄생했다. 러시아 발레의 양대 산맥인 볼쇼이 발레단과 마린스키 발레단의 혈통을 모두 이어받았다는 점은 이 작품을 러시아 발레와 등치시키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백조의 호수’는 이분법의 발레다. 한 명의 프리마 발레리나가 연기하는 오데트(백조)-오딜(흑조)은 선과 악, 성녀(聖女)와 성녀(性女), 내적 몰입과 외적 발산, 그리고 표현력과 테크닉을 뚜렷이 대조시킨다.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합작 역시 이분법을 증폭시킨다. 흔히 프티파의 3대 고전발레로 ‘잠자는 미녀’(1890), ‘호두까기 인형’(1892)과 ‘백조의 호수’가 꼽히는데, ‘백조의 호수’에선 당시 몸이 아프던 프티파가 1막과 3막의 궁정 장면만 안무하고 조수였던 이바노프가 2막과 4막의 호숫가 장면을 안무했다. 프티파가 장황한 궁정 의례와 다채로운 디베르티스망, 그리고 무용수의 기량을 과시하는 독무를 만드는 데 귀재였다면, 이바노프는 보다 서정적이고 자기성찰적인 백조들의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화려한 궁궐과 몽환적인 호숫가, 오딜의 32바퀴 푸에테와 오데트의 독백적 솔로, 고전적 비례미와 초자연적 환영이 팽팽한 균형을 이룬 프티파-이바노프의 버전은 고전으로 군림하며 끝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초연했으되 철저히 실패했던 볼쇼이 발레단이 다시금 ‘백조의 호수’의 역사에 떠오른 것은 소비에트 연방 결성 이후다. 소련의 모스크바 천도 이후 볼쇼이 발레단은 대담하고 원초적이며 남성적인 스타일을 구축하며 대외적으로 소련의 힘을 상징했다. 내한공연에서 선보일 버전은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1969년도 버전을 2001년 개작한 것이다. 1964년부터 1995년까지 볼쇼이 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군림한 그는 ‘스파르타쿠스’와 같이 강한 남성적 에너지를 뿜어내는 볼쇼이 특유의 스타일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다. 프티파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국적 취향을 가시화했다면 그리고로비치는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했기에, 그의 ‘백조의 호수’는 보다 직설적이고 대담했다.

소련 발레와 동일시되던 안무가가 소련 멸망 이후 개작한 ‘백조의 호수’는 어떨까. 그리고로비치는 호수를 왕자의 내면심리로 대체하고, 로트발트를 지그프리드의 또 다른 자아로 바꿨다. 갈등의 원인을 외부의 악에서 내면의 혼란으로 대체함으로써 개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또한 안무자의 세계관이 가장 드러나는 엔딩에서 오데트가 악마의 품에서 죽고 지그프리드는 혼란 속에 남겨진다. 소비에트 시절의 과한 해피엔딩을 상쇄하려는 듯 철저히 비극적이고 개인적인 해석으로 처리된다. 대머리 백조(마츠 에크)나 남자 백조(매튜 본), 강간(제임스 쿠델카) 등 90년대 이후의 파격적인 재해석들에 비하면 그리고로비치의 개작이 미약해 보일수 있다. 하지만 관전 포인트는 파격적인 대본이 아니라 섬세한 움직임에 있다.

볼쇼이 발레단은 2013년 황산테러 사건을 비롯해 각종 내부 갈등과 재정적 위기로 진통을 겪었다. 2016년 취임한 마하르 바지예프 감독이 혁신을 꾀하고 있는데, 내한 공연의 두 백조 율리아 스테파노바(28일)와 알료나 코발료바(29일)가 모두 마린스키 계통의 바가노바 발레아카데미를 졸업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보수적인 볼쇼이에서 이들의 파격적인 기용은 볼쇼이-마린스키의 이분법을 흩트린다. ‘백조의 호수’가 볼쇼이와 마린스키를 거치면서 비로소 고전으로 탄생할 수 있었듯, 마린스키의 정제된 테크닉과 볼쇼이의 역동적인 에너지가 일으킬 핵융합이 볼쇼이 발레단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기간: 5월 28~29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문의: 02-580-1300

글 정옥희 춤 연구자 사진 빈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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