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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CEO·정치인 늘리는 게 페미니즘은 아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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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호 30면

페미니즘 대폭발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제사 크리스핀 지음
유지윤 옮김, 북인더갭

급진·영성·개량 등 분화 두드러져 #남성에 반대하는 게 본령 아니야 #가부장적 자본주의부터 고쳐가야 #데이트·성생활 행동지침 제안도

여신을 찾아서

김신명숙 지음, 판미동

지워지지 않는 페미니즘
윤김지영 지음, 은행나무

여신을 찾아서

여신을 찾아서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정희진·서민·손아람·한채윤·
권김현영·손희정·홍성수 지음
교육서가

처음 만나는 페미니즘
제시카 발렌티 지음
노지양 옮김, 교양인

페미니즘 서적들이 쏟아진다. ‘페미니즘 빅뱅’이다. 페미니즘(feminism)이란 무엇일까. 이즘(ism)이다. 이즘은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나오는, 주의(主義)와 동의어인 외래어다. 이런 용례가 나온다. “그건 염상진이라는 개인의 뜻이 아니라 정치 폭력화한 이즘의 충돌이었던 것이다.《조정래, 태백산맥》/ 죽음을 걸 만큼 그 이즘이라는 것이 그렇게 절대한 가치였었는지를 나는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김성동, 만다라》.”

역사적 변화나 진보는 공짜로 얻는 게 아니다. 변화는 행동·운동을 요구한다. 미국은 수많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노력으로 1920년 여성 선거권을 인정하는 나라가 됐다. 전미여성참정권협회(NWSA)가 주도한 1913년 3월 3일 여성 참정권을 요구한 행진의 공식 책자 표지. [그림 미국 의회도서관]

역사적 변화나 진보는 공짜로 얻는 게 아니다. 변화는 행동·운동을 요구한다. 미국은 수많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노력으로 1920년 여성 선거권을 인정하는 나라가 됐다. 전미여성참정권협회(NWSA)가 주도한 1913년 3월 3일 여성 참정권을 요구한 행진의 공식 책자 표지. [그림 미국 의회도서관]

유럽·미국 기준으로 대표적인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급진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문화 페미니즘, 환경 페미니즘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여성주의를 비롯한 이즘·주의는 계속 진화하고 분열한다. 페미니즘이라는 ‘우산 용어(umbrella term)’ 속에서 다양한 페미니즘 조류가 공존하고 경쟁하며 서로 맹공을 퍼붓기도 한다. 심지어는 보수 페미니즘도 있다. 보수 페미니즘이라는 페미니즘의 작은 우산 속에는 개인주의적 페미니즘, 복음주의 페미니즘, 국가 페미니즘, 포스트페미니즘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남성 페미니즘도 있고 생활 페미니즘도 있다. ‘미투 페미니즘’ ‘메갈리아 페미니즘’ ‘워마드 페미니즘’도 충분히 가능하다.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체계화된 학설·이론·운동 속에서 각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지워지지 않는 페미니즘

지워지지 않는 페미니즘

형용모순 같은 ‘안티페미니즘적인 페미니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가 그런 경우다. 원제는 ‘나는 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페미니스트 선언(Why I am not a feminist: a feminist manifesto)’이다.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1927)와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을 한꺼번에 연상키는 묘한 제목이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선례를 감안하면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제목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좌파 페미니스트 논객인 저자가 반대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 만족하고 적응하는 미국의 주류 페미니즘이다. 미국 페미니즘은 급진적인 변혁 운동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으로 추락했다는 뜻이다. 그가 보기에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저자 크리스핀은 개량주의·점진주의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저자는 ‘이빨 빠진(toothless)’ 페미니즘이 여성 최고경영자(CEO), 여성 정치인 숫자의 확대에 만족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 페미니즘은 저자에게 탈정치화된 ‘자기계발 페미니즘’에 불과하다. 체제를 바꾸지 않는 페미니즘은 의미가 없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크리스핀은 기성 페미니즘을 맹공하지만, 특정 페미니스트 운동가나 그룹을 타깃으로 삼아 지칭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공동의 적을 눈 앞에 두고 불필요한 싸움, 적전분열을 피하기 위해서다. 같은 이유로 크리스핀은 남성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깎아 내리는, 온라인·디지털 세상을 주무대로 삼는 ‘격노(outrage) 페미니즘’에도 반대한다. 그는 남성혐오를 혐오한다. 반성하는 남성은 페미니즘의 우군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듯 하다.

‘영성 페미니즘’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여신을 찾아서』를 쓴 김신명숙 작가는 국내 최초 여신학(Goddess Studies) 박사다. 김신명숙 작가는 크리스핀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꿈꾼다. 해답을 여신에게서 찾았다. 그는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된 ‘여신 페미니즘’을 한국 여성, 한국인의 관점에서 확장한다. 10년간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제주도·지리산·경주까지 국내외 현장에서 다양한 여신 이야기를 발굴했다. 유대교·그리스도교의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하와 이야기에서 뱀·나무·여성을 신성시한 여신 신앙의 흔적을 발견했다. 또 첨성대가 우물이라는 학계와 대중적인 견해를 확장해 ‘첨성대는 신라의 여신상’이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김신명숙 작가 또한 남성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여성의 몸에서 탄생한다. 이 엄연한 사실에 여신의 뿌리가 있다. 여신은 모든 이분법적 구분을 뛰어넘어 전체를 감싸며, 뭇 생명과 존재들의 상호연결성과 상호의존성을 드러낸다. 남성 또한 여신의 일부다.”

처음 만나는 페미니즘

처음 만나는 페미니즘

『헬페미니스트 선언』(2017)의 증보판인 『지워지지 않는 페미니즘』의 부제는 ‘더 민감하게 분노하고 통감하라’이다. 저자인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이렇게 촉구한다. “남성들은 자신의 방관과 침묵·가해의 역사를 은폐할 것이 아니라, 남성 카르텔의 수혜자로 직·간접적으로 복무해온 것에 대한 성찰과 내부 고발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는 7명의 인기 페미니즘 강연을 묶은 책이다. 부제인 ‘페미니즘이 던지는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이 시사하듯, 이 책은 우리 정치권의 보수와 진보가 남성연대·여성혐오·이성애중심주의·젠더감수성 부재를 탈피할 것을 촉구하고 호소한다. 제6강에서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인 손희정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사회는 정치적 지형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상상력에서도 거대한 두 개의 남성-동성사회가 싸우고 있다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폐’니 ‘빨갱이’니 하면서 삿대질을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이 둘 모두 거대한 ‘성(性)적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죠.”

『처음 만나는 페미니즘: 내 일상을 바꾸는 페미니스트 행동 전략』의 원제는 ‘가차 없는 페미니즘’ ‘정면(正面) 페미니즘’으로 번역할 수 있는 ‘Full-frontal Feminism’이다. 페미니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 받는 이 책의 영문판은 2007년에 나왔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여성·남성들에게 개론서 구실을 톡톡히 할 수 있는 책이다. ‘실천주의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페미니스트가 데이트하는 법’, ‘성과 관련된 행동 지침’ 같은 실생활 속 문제도 다뤘다. “페미니즘은 모든 것을 반대하고 부정하는 운동이 아니다. 매우 긍정적이고, 삶을 변화시키며, 재미 있고 멋지게 인생을 사는 방식이다”라는 대목에 울림이 있다. 그는 남자에게도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온건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발렌티는 온갖 욕설에 살해·강간 협박까지 받았다. 일부 남성의 이러한 반응은 ‘온건 페미니즘’이 설 땅을 좁힌다.

페미니즘 관련서는 남성 독자들을 좀 불편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남성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일임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이즘·주의이기 때문에 남성들 또한 페미니즘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 케케묵은 국가주의 표현을 쓴다면 우리나라가 ‘페미니즘 강국’이 돼 페미니즘을 수입만 하는 게 아니라 수출하기 위해서다. 한국 페미니즘을 공감과 보편성과 정치적·사회적 변화의 잔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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