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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편집국장레터]혼수문제로 다투는 트럼프와 김정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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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호 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연합뉴스]

 글린 데이비스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채 연신 싱글벙글이었습니다. “회담이 잘 될 경우를 대비해 호텔 체크아웃 날짜를 오픈(open)해 놓았다”는 얘기도 스스럼없이 했습니다. 회담 장소인 베이징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북미회담의 베테랑 격인 클리퍼드 하트 6자회담 특사가 옆에서 잔뜩 긴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는 딴판이었습니다. 2012년 2월, 워싱턴D.C.  한 복판에 위치한 미국 국무부 청사 지하1층 리셉션 홀의 기억입니다.

VVIP독자 여러분 5월의 세째주 잘 보내셨습니까. 중앙SUNDAY 편집국장 박승희입니다.
이번 주 레터의 소재를 고민하다가 또 다시 북미정상회담 얘기를 꺼냈습니다. 요즘 점심ㆍ저녁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기도 하고, 회담을 3주일 앞둔 지금까지도 북한과 미국 사이에 ‘하느냐, 마느냐’ 얘기가 오가고 있어서입니다.

6년 전 북미회담 얘기를 꺼낸 건 북한에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 미국과 한 첫 비핵화 회담이었기 때문입니다. 회담 결과는 좋았습니다.
‘북, 영변 우라늄 농축 잠정 중단…워싱턴ㆍ평양 동시 발표’ ‘미, 영양 식품 24만t 지원/ 북, 회담 진행 중 핵ㆍ미사일 실험 유예’
2012년 3월1일자 중앙일보 1면 톱 제목이었습니다. 합의를 끌어낸 회담 당사자는 미국에선 글린 데이비스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였고, 북한에선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비극은 길지않은 순간 찾아왔습니다. 그로부터 45일 뒤인 4월14일자 중앙일보 1면 톱 제목은 ‘김정은의 꿈 공중폭발’이었습니다. 북한이 미국과 맺은 합의를 깨고 장거리 로켓을 발사(미국 입장에선 탄도미사일 실험 발사)한 겁니다. 당시 워싱턴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북한은 ‘회담 중 미사일 실험 유예’가 문서화된 합의가 아니라고 발뺌했고, 백악관에선 합의 문구를 꼼꼼히 챙기지 않은 데이비스 특별대표의 책임론이 일었습니다. 교수 출신으로 비핵 협상을 처음 다룬 데이비스 특별대표는 동네북이 됐습니다.
그 뒤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는 2년여동안 미 국무부 내에서 북한과의 협상을 거론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워싱턴 외교가에선 이 사건을 ‘Leap day deal(윤일 담판)’이라고 부르며 교훈을 삼습니다. 나중에 데이비스 특별대표는 “내가 김계관을 너무 믿었다. 순진했었다(naive)”고 술회했더랬습니다.

북미회담을 앞두고 워싱턴에서 김계관이란 이름 석자가 다시 회자되고 있습니다. 현재 나이 일흔다섯살의 김계관은 북한 내 ‘살아있는 북한 핵 회담의 역사’입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한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부터 조지 W 부시를 거쳐 버락 오바마 행정부까지 김계관은 미국의 다양한 외교관들을 상대로 핵 협상을 해왔습니다.
결과적으로 김계관과 핵 협상을 했던 미국의 파트너들은 미 외교사에서 ‘김계관에게 당한 사람들’ 묶음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런 김계관이기에 “우리를 구석으로 몰고 가 일방적인 핵 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우리는 그러한 대화에 더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는 그의 16일 담화는 워싱턴을 흔들기 충분합니다. 특히 김계관에게 이를 가는 사람 중 한 명이 볼턴입니다.

그렇다면 북미회담의 운명은 어찌될까요.
지금까지의 북미회담은 김정은-폼페이오-트럼프 라인으로 얘기가 돼왔습니다.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조력자 겸 중재자로 나서고, 볼턴은 끼어들 틈을 엿보는 방관자 국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주 들면서 분위기가 돌변, 북한이 한미 공군합동훈련을 문제삼아 김계관-이선권으로 이어지는 북미회담 재검토론이 불거졌습니다. 청와대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이런 북한측 기류에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이 영향을 받을지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까진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통해 김정은의 비핵의지가 강하다는 걸 전달받고 잔뜩 고무돼 있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김계관으로 시작된 북한의 엄포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경우 김정은을 협상 파트너라고 생각했던 트럼프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17일 트럼프의 입에서 ‘의심’이라는 표현이 나온 건 가볍게 볼 수 없는 시그널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17일(워싱턴 시간) 백악관에서 옌스 스톨텐베르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과 만난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김정은에게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나는 그들(북한)이 중국과 만났을 때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김정은은 중국과 두번째 회담을 했다. 그 것은 약간 ‘깜짝 회담’이었다. 두번째 회담을 한 뒤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무슨 일이든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아주 좋은 상태일 것이다. 거래를 하려면 양쪽 상대가 모두 원해야 한다. 그(김정은)는 틀림없이 거래를 원했었다”.
트럼프의 시그널은 계속됩니다. “어쩌면 그는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중국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지켜보자. 내 친구인 시 주석은 매우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는 중국을 대변하고 나는 미국을 대변한다. 그게 돌아가는 이치이다.”

뉘앙스로 보면 북한 김계관과 달리 아직 트럼프가 회담 자체를 재고하는 수준까지는 아닌 게 분명합니다. 여전히 북한에 줄 당근도 언급했습니다. 볼턴이 말한 리비아모델을 거둬 들이면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번영이 있을 거라고 약속했습니다. 카다피가 축출된 리비아 모델과 달리 “김정은은 그의 나라에 남아 계속 국가를 운영하게 될 것”이라며 체제 보장도 못박았습니다. 김정은을 향해 체제 보장과 경제적 지원이라는 가장 확실한 육성 약속을 한 겁니다.

북한이 이런 트럼프의 발언에 다시 화답하면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이 유효할 겁니다. 다음 주 월요일 태평양을 건너는 문재인 대통령으로선 혼사를 앞두고 갑자기 혼수문제로 파혼 얘기까지 오가는 신랑과 신부를 달래는 중매자의 심경일 겁니다. 6월12일까지는 이래저래 북미 사이에서 살얼음을 걸어야 하는 형국입니다. 22일 한미 정상회담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북한의 엇나가기도 이 정도에서 멈춰져야 합니다. 워싱턴에 김계관 트라우마가 더 확산돼 트럼프 대통령의 귀까지 잡는다면 ‘Leap day deal’의 악몽이 재연될 수 있어서입니다.

한반도 외교게임이 비핵화를 거쳐 정전선언, 평화체제라는 대하 드라마로 완성되려면 이런 일일극이 앞으로도 몇 차례 더 계속돼야 할지 모릅니다.

이번주 중앙SUNDAY는 탐사보도 기사로 '버려진 아이들...그 아이들에겐 단 한 명의 어른이 필요했다'가 실립니다. 소년범들을 돌보는 판사로 잘 알려진 천종호 판사가 3년 가까이 모아둔 아이들의 기록을 탐사보도팀이 분석했습니다. 1876명의 기록입니다. 순간의 실수로 비행을 저지른 아이들, 가정형편 때문에 버려져 키워진 아이들의 아픔에 우리는 언제 한번 제대로 귀를 기울였을까요. 우리에게 관심 한 번 보인 적이 있느냐는 아이들의 꾸짖음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뉴스 포커스에선 45만명 화물차 운전기사분들이 40개의 전용 휴게소를 전전하다보니 도로 위에서 졸기 일쑤라는 실상도 전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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