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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참상, 전 세계에 알렸다”…38년 전 ‘벽안(碧眼) 의인들의 증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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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남편인 고(故) 찰스 헌틀리에게 쓴 편지를 읽는 마사 헌틀리. 80년 5월 당시 시민에게 곤봉을 휘두르는 계엄군. [중앙포토]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남편인 고(故) 찰스 헌틀리에게 쓴 편지를 읽는 마사 헌틀리. 80년 5월 당시 시민에게 곤봉을 휘두르는 계엄군. [중앙포토]

“마지막 순간에도 ‘광주에 묻히고 싶다’고 했던 당신. 그 사랑했던 광주는 이제 정의의 다른 이름이 되었습니다.”

38주기 5·18기념식, 광주서 엄수 #힌츠페터·헌틀리 부인 등 한자리에 #빗줄기 속 이 총리 등 5000명 참석 #‘정의’ 강조한 추모행사도 ‘눈길’ #7살 이창현·영화 합친 ‘시네라마’ #‘가두방송’ 전옥주씨도 상황 재현

18일 오전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5·18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미국인 목사 고(故) 찰스 헌틀리의 아내 마사 헌틀리가 남편에게 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제가 본 80년 광주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며 “헌혈하는 시민에게 ‘너무 많은 피를 나눠줘서는 안 된다’고 말려야 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신은 한국에 대한 사랑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며 “그런 광주는 이제 정의의 이름이 되었다”고 말했다.

38주기 5·18기념식을 맞아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고 아놀드 피터슨 목사의 부인 바바라 피터슨과 고 찰스 헌틀리의 부인 마사 헌틀리,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왼쪽부터). 프리랜서 장정필

38주기 5·18기념식을 맞아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고 아놀드 피터슨 목사의 부인 바바라 피터슨과 고 찰스 헌틀리의 부인 마사 헌틀리,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왼쪽부터). 프리랜서 장정필

제38주기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거행됐다. ‘오월 광주, 정의를 세우다’를 주제로 진행된 기념식은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한 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총리는 기념사에서 “광주는 항상 민주주의와 함께해 왔다”며 “광주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의’에 초점을 맞춘 추모공연은 올해 처음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결합한 ‘시네라마’로 진행됐다. 5·18 당시 행방불명된 이창현(당시 7세)군의 사연에 5·18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와 ‘화려한 휴가’ 등을 접목한 공연이었다. 참석자들은 이군의 아버지 이귀복(81)씨 등 80년 당시 희생자·행불자의 사연과 영화 속 내용을 재구성한 공연을 보며 당시의 참혹함을 떠올렸다.

‘시네라마’는 이군의 아버지 역할을 맡은 배우가 추모객들 사이에서 나타나면서 시작됐다. 그가 “창현아, 어디 있니?”라며 거리와 병원을 돌며 아들을 찾는 모습은 추모객들을 안타깝게 했다. 시간을 뛰어넘어 지난해 진행된 5·18 암매장 추정지 발굴작업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18일 제38주년 5·18기념식에서 80년 5월 당시 아들 이창현(당시 7세)군을 잃어버린 아버지 이귀복(71)씨의 모습과 계엄군에 부상당한 학생들의 모습을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18일 제38주년 5·18기념식에서 80년 5월 당시 아들 이창현(당시 7세)군을 잃어버린 아버지 이귀복(71)씨의 모습과 계엄군에 부상당한 학생들의 모습을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공연의 말미에는 실제 이씨가 등장해 “아무리 찾아도 아들은 오지 않고 소리도 없었다”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창현이를 찾기 위해 안 간 곳이 없다”며 “오는 9월 발굴작업이 재개되면 흔적이라도 찾고 싶다”고 했다.

이군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인 80년 5월 19일 집에서 나간 뒤 귀가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씨 등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지 않자 결국 1994년에 5·18 행방불명자로 등록됐다.

이날 기념식에는 5·18 당시 시민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가두방송을 했던 전옥주씨가 실제 출연해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전씨는 38년 만에야 공개된 5·18영상 기록물에서 무장한 계엄군과 군중 사이에서 확성기를 손에 쥔 모습이 확인되기도 했다. 전씨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이요원이 열연한 ‘신애’의 실재 인물이기도 하다.

5·18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 사이에서 가두방송하는 전옥주씨의 모습. 전씨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이요원이 열연한 ‘신애’의 실재 인물이다. [뉴시스]

5·18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 사이에서 가두방송하는 전옥주씨의 모습. 전씨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이요원이 열연한 ‘신애’의 실재 인물이다. [뉴시스]

38주년을 맞은 기념식에는 신군부의 유혈진압에 굴하지 않고 5·18의 진실을 알린 외국인 가족들이 대거 참석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 등이 5·18묘역을 찾아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힌츠페터는 독일 제1공영방송 기자로 민주화운동 현장을 영상에 담아 광주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힌츠페터와 함께 5·18의 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헌틀리 목사의 부인 마사 헌틀리, 고(故) 아놀드 피터슨 목사의 부인 바바라 피터슨 등도 기념식에 참석했다.

헌틀리 목사는 80년 5월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이자 의사로 활동하며 계엄군의 만행과 희생자 시신 등을 사진으로 남겨 해외 언론에 알렸다. 5·18때는 ‘대피 하라’는 미국 정부의 권고를 거부한 채 계엄군에 쫓기는 시민들을 피신시키고 부상자들을 도왔다. 지난해 6월 81세로 타계한 그는 생전 “광주에 묻히고 싶다”라는 희망에 따라 지난 17일 광주 남구 양림선교동산묘원에 일부 유골이 안장됐다.

38주기 5·18기념식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학생들이 80년 5월 당시 광주의 상황을 듣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38주기 5·18기념식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학생들이 80년 5월 당시 광주의 상황을 듣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아놀드 피터슨 목사는 광주에서 가족과 함께 선교사로 활동한 5·18의 산증인이다. 역사학 교수이기도 한 그는 학자의 시각으로 5·18 상황을 기록하고 학살 현장과 헬기 사격 등을 증언했다. 5·18 당시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벽안(碧眼)의 의인들이 38년이 지난 이 날 한자리에 모여 80년 5월의 의미를 되새긴 것이다.

광주광역시=최경호·김호 기자 ckhaa@joongang.co.kr

이낙연 국무총리가 18일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8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마친 뒤 5·18 희생자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낙연 국무총리가 18일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8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마친 뒤 5·18 희생자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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