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도시 패션위크 말고도 요즘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이 새로운 컬렉션을 내는 곳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세계 최대 디자인 축제로 불리는 밀라노 ‘살롱 드 모빌레’다. 패션 위크가 아닌 가구 박람회에 왜 패션 브랜드가 외유를 나섰을까.
글=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사진=각 브랜드
COS, 가구 없이 '가구 박람회' 참가
지난 4월 17일부터 22일까지 밀라노에서 열린 ‘2018 살롱 드 모빌레(salone del mobile)’는 세계 최대 가구 박람회다. 최근 들어 주축이 됐던 가구 전시회뿐 아니라 같은 기간 도시 곳곳에서 열리는 장외 전시까지 주목받으면서 통칭 ‘디자인 위크’로도 불리게 됐다. 전 세계인이 찾는 디자인 축제로 자리매김한 살롱 드 모빌레는 올해 역시 디자인 분야의 많은 브랜드가 참석해 신제품을 선보였는데, 이 중 패션위크에서나 이름을 볼 법한 수많은 패션 브랜드들의 전시가 큰 축을 이루면서 눈길을 끌었다.
홈 컬렉션을 오래전부터 출시해온 에르메스·아르마니·펜디·루이비통 등의 브랜드가 살롱 드 모빌레에 참석하는 것은 그리 새롭지 않다. 하지만 참가 규모가 점차 방대해지고, 디자이너·건축가와의 활발한 협업을 통해 다양한 콘텐트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이전보다 한층 적극적인 모양새다.
게다가 에르메네질도 제냐·로에베·마르니 등 홈 컬렉션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지 않는 패션 브랜드까지 살롱 드 모빌레에서 좋은 전시로 입소문 나면서 해마다 방문객이 증가하고 있다. 고가의 명품 브랜드뿐만이 아니다. 스웨덴의 중저가 의류 브랜드 COS는 2012년부터 올해까지 벌써 7번째 살롱 드 모빌레에 참여하고 있다.
COS의 올해 전시 주제는 ‘오픈 스카이(OPEN SKY)’로 설치미술가 필립 케이 스미스와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16세기 건물 마당에 설치된 거대한 조각물은 건축과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구조적인 디자인의 의상을 선보이는 브랜드 철학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COS는 지난해에도 영국 디자인 스튜디오 스와인(Swine)과 협업해 ‘뉴 스프링’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선보이면서 이탈리아 디자인 대학 IED가 선정한 ‘최고의 관련성상’을 받았다. 브랜드 관계자에 따르면 이 전시에만 2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다.
패션 넘어 라이프스타일로 영역 확장
2000년 홈 컬렉션 ‘아르마니 까사’를 론칭한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2010년 두바이, 2011년 밀라노에 ‘Stay with Armani(아르마니와 머물다)’라는 콘셉트로 호텔을 열었다. 우아하면서도 절제된 아르마니 특유의 감성을 객실 인테리어부터 혁신적인 호텔 서비스에까지 담았다. 보테가 베네타는 2015년 홈 컬렉션 단독 부티크를 오픈하면서 "보테가 베네타의 감성을 옷이나 액세서리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즐기고 싶어하는 고객의 니즈를 반영했다"고 밝힌바 있다. 가방이나 액세서리를 넘어 자신이 머무는 공간까지 좋아하는 브랜드로 채우고 싶은 욕망, 패션을 넘어 라이프스타일(생활방식) 전반에 자신의 취향을 반영하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사람들은 점점 ‘소유’가 아닌 ‘경험’을 통해 향유하는 럭셔리를 원하고 있다.
럭셔리 산업이 라이프스타일 분야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가구·벽지·홈 패브릭·그릇·소품 등의 제품을 출시하며 고객(관람객)과 소통하는 브랜드가 늘고 있고, 이들이 내놓는 홈 컬렉션의 전초기지가 바로 밀라노 살롱 드 모빌레다.
에르메스는 2011년부터 참여해 올해로 8번째 전시를 맞았다. 올해는 타일을 활용한 구조적인 공간을 만들어 새로운 홈 컬렉션을 선보였다. 손맛이 감도는 이국적 느낌의 타일로 전체 구조를 만들고 그 안에 포슬린 화병·트레이·데스크 용품·스툴·패브릭·벽지 등을 전시했다. 에르메스 특유의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리빙 아이템들이었다.
'여행 예술’을 브랜드의 근간으로 하는 루이비통은 매년 한정판 가구 컬렉션 ‘오브제 노마드’를 제작해 선보이고 있다. 올해도 여러 산업 디자이너들과의 협업한 소파·스윙 체어·접이식 스튤 등 다양한 작품을 출품했다.
패션 브랜드의 홈 컬렉션 전시는 브랜드 철학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매거진 헤렌의 정세영 편집장은 “자신들이 강조하려는 패션 세계의 이미지를 리빙 분야로 넓혀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월간 디자인의 전은경 편집장은 “섬유나 패턴, 소재에 관한 전문성을 지닌 패션 브랜드가 핸드백이나 의류를 만들다가 그 연장선으로 브랜드 감성을 담은 벽지나 테이블보, 더 나아가 소파 등의 가구를 만드는 것은 자연스럽다”며 “패션과 리빙은 그만큼 이미지 전유가 쉬운 분야”라고 했다.
라이프스타일 시장의 확대도 패션 브랜드의 홈 컬렉션 진출을 부추기고 있다. 특히 현재 라이프스타일 산업이 성장 중인 중국 및 한국 등의 아시아 시장이 이들의 주요 타깃이다. 이번 살롱 드 모빌레에서 토이즈 컬렉션을 출시한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중국의 전통 게임인 마작을 모티브로 한 제품을 내놓고, 부스에는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직원도 뒀다.
오브제로 브랜드의 장인 정신 표현
본격적으로 라이프스타일 상품을 출시하지 않으면서 공예 정신과 장인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살롱 드 모빌레를 찾는 브랜드들도 있다. 같은 물건이라도 극상의 디테일을 강조해 공예 혹은 예술로서의 가치를 담고자 하는 노력을 유니크한 오브제(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살린 미술품)를 통해 표현하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 디자인 스튜디오나 건축가, 공예 장인 등과 협업해 오브제와 설치물 등 다양한 콘텐트를 제작·전시하고 있다.
마르니는 올해 ‘베레다 페스티벌’이라는 테마로 콜롬비아 여러 지역 커뮤니티들과 협업해 그들의 민속문화에 브랜드 특유의 실험적 접근을 더한 수공예 제품들을 선보였다. PVC 직물, 기하학 패턴과 스트라이프, 위빙 기법 등을 반영한 바구니나 해먹, 독특한 오브제 등이다.
공예·장인 정신을 브랜드 철학의 근간으로 삼는 로에베는 전 세계 공예 장인들과 함께 담요, 타페스트리(직물), 한정판 토트백 등을 만들어 전시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를 1년 넘게 돌아다니며 공예 장인들을 만났다고 한다.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지난해부터 살롱 드 모빌레 기간 동안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 ‘토이즈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다. 올해는 제냐 슈트 원단 방식으로 짠 가죽을 이용해 레저·여행·게임 용품과 오디오 액세서리 등을 제작했다.
앞서 언급한 COS의 설치 전시를 비롯한 이들 브랜드가 한정판의 소수 리빙 제품 또는 아트 오브제로 살롱 드 모빌레에 참여하는 이유는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하고 이슈를 만드는 목적이 크다. 정은주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살롱 드 모빌레 출품작 중 이들 패션 브랜드들의 전시는 ‘오트 쿠튀르(소수의 고객을 위한 고급 맞춤복) 컬렉션’을 연상시킨다”며 “새로운 물건을 소개하고 쓰임을 강조하기보다, 일상에 영감을 주는 공예 아트를 만나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고 했다.
밀라노 살롱 드 모빌레 자체의 성장도 패션 브랜드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었다. 디자인 업계 종사자들에 한정된 전문 전시라는 개념이 컸던 과거에 비해, 최근에는 라이프스타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 이벤트로 인식되고 있다. 여러 패션 브랜드가 이곳을 브랜드 가치와 역사를 선보이는 장으로 적극 활용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