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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타쿠, 누가누가 잘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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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손타쿠(忖度·윗사람의 뜻을 헤아려 행동함)라는 단어는 2017년 ‘올해의 유행어’로 선정됐다. 원래는 좋은 의미였는데, 가케·모리토모학원 스캔들과 연관돼 사용되면서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요즘 일본 정가에선 새로운 차원의 ‘손타쿠’가 펼쳐지고 있다. 마치 누가 더 손타쿠를 잘하는지 보여주기라도 하듯 정부 고위 관료들의 행태가 화제다. 최근 새롭게 등장한 인물은 야나세 다다오 경제산업성 심의관이다. 정치인이 장관을 하는 일본의 정부부처에서 심의관은 사무차관에 이은 ‘넘버 3’다.

문제의 발단은 3년 전 그가 총리 비서관을 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가케학원의 수의학부 신설 문제에 대해 “총리의 안건”이라며 사업 추진을 압박했다는 회의 자료가 발견됐다. 처음엔 “회의를 한 기억이 없다”고 발뺌했지만 여론이 나빠지자 “회의에 참석했다는 쪽으로 기억을 조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국회에 출석해 “상대가 10명이나 돼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명함도 남아 있지 않다”며 불리한 기억에는 여전히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다음 반전이 벌어졌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에히메현(가케학원 수의학부가 신설된 지역) 공무원이 야나세 비서관에게 받은 명함을 공개했다. 명함에는 붉은색 잉크로 회의 날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꼼꼼한 지방공무원은 야나세 비서관이 경제산업성 출신이라는 것까지 적어두었다. 손타쿠하느라 조정됐던 ‘기억’이 말단 공무원의 ‘기록’ 앞에서 무너진 순간이었다.

이 같은 장면이 낯설지 않은 건 불과 두 달 전 사가와 노부히사 국세청장의 행태와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국유지 헐값 매각 의혹에 대해 “기록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던 그는 올 초 재무성 문서 조작이 발각되면서 거짓말이 들통났다.

둘 다 사과하면서도 왜 거짓말을 했는지, 누구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까지 정권에 ‘손타쿠’를 한 것도 꼭 빼닮았다.

저널리스트인 아오키 오사무(青木 理)는 “국민으로부터 선택받은 정권에 충성하는 것이 본래 관료의 책무인데, 지금은 (정권에) 충실할수록 국민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애초에 정권과 국민이 괴리됐기 때문에 발생한 모순이었다.

얼핏 일본 국민들은 정권의 부조리를 잘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견고했던 권력에도 누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촛불집회’ 같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지역 유권자를 만나고 온 한 여당 국회의원은 “당신도 아베 정권과 한 패냐”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