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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52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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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

대한민국의 노동시계가 52시에 멈췄다. ‘소득주도성장’ 사령부의 준엄한 명령이다.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에 도달한 나라의 국격을 지켜야 한다는 비장한 결단이 장시간 노동에 조종을 울렸다. 기대하던 바다. 육신을 지치게 만들었던 ‘장시간 저임금’의 세계적 불명예는 이걸로 말끔히 씻길 것이다. 대한민국은 저녁 있는 삶, ‘단시간 고임금’이란 신세계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장대하고 야무진 결행에 박수를 보낸다. 아름답다. 그러나 결코 아름답지 않은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게 불안하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되면서 #저소득 근로자가 최대 피해자 #청와대부터 고집부리지 말고 #유연근무·탄력근무제 허용하고 #저소득층 특례업종 늘려야 한다

방송국 기사 K모씨는 요즘 머리가 아프다. 아침저녁 특근을 못 하면 월 50만원 정도 소득이 줄어든다. 월급의 15%다. 미국발 금리 인상이 주택담보대출 이자율을 자극할 거란 소문에 재작년 겨우 마련한 성남시 아파트를 처분할지 장고에 들어갔다. 단골 술집에는 투잡을 찾는 이가 늘었다. ‘이게 서민을 위한 정책인가요?’ 문재인 정권 열혈 지지자인 K씨는 종잡을 수 없다. 편의점 알바 L씨는 3시간짜리 단타 고용을 서너 개 해야 한다. 이동시간과 교통비 손실이 크다. 주휴수당 때문에 주 15시간 고용을 피하고 보자는 사장의 궁여지책에 유탄을 맞았다. 52시에 멈춘 노동시계로 결정타를 맞은 집단이 건설노동자, 계절노동자다. ‘저녁 있는 삶’을 보내고 ‘잠 설치는 밤’을 버텨야 한다.

소득주도성장을 향한 야심찬 정책들은 ‘이론적’ 수혜대상자를 ‘실질적’ 궁지에 몰아넣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충북 소재 면 생산 중견기업은 최근 기업분할을 결정했다. 340명을 170명씩 쪼개 노동시간 단축 적용을 2020년까지 모면하려는 궁색한 대응이다. 어떤 대기업 납품업체는 R&D파트와 생산파트를 분할했다. 정부의 규제망을 일단 벗어나고 신규채용에 고용지원금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언제는 ‘히든챔피언’이 되라 하더니 이제는 잘게 잘라야 생명을 연장한다.

송호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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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공장, 힘센 노조원은 연 2000만원에 달하는 잔업수당에 중독됐다. 연 1억원 소득을 유지하려면 주말 특근을 해야 한다. 그러나 52시 노동시계는 이들의 중독증에 쐐기를 박았다. ‘임금 삭감 없는 노동단축’을 투쟁 목표로 내건 금속노조를 정부 대신 기업주가 상대해야 한다. 인건비 폭등에 울고 싶은 농민의 심정을 헤아리는 사람은 없다.

현 정권이 중시하는 하층 노동자, 영세업 종사자들이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최대 피해자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투잡 뛰는 사람을 양산하고, 중소 상공인에게는 인건비 폭탄을 안겼다. 작년 대비 인건비 부담이 15% 늘었다. ‘알바천국’은 파트타임 일자리가 작년 대비 12% 줄었다고 집계했다. 이런 추세가 반전될까, 이대로 주저앉을까? 청와대 정책팀은 초조하다. 반전일까, 바닥일까를 정확히 예측할 이론과 근거가 없다. 최저임금의 경우에도 미국의 연구 결과는 엇갈린다. 뉴저지주에서 최저임금 인상의 고용감축 효과는 미미했지만, 시애틀에서는 특히 저숙련 노동자에게 부정적 충격이 집중됐다. 청와대 정책팀은 그저 최저임금 인상분과 신규 채용 지원금을 살포해 상황 반전을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잠복근무하는 형사, 장거리 버스 기사, 간병사, 복지사, 서비스 근로자 등 52시를 밥 먹듯 넘는 직업군들에게 노동시간 단축이 가뭄 끝 단비가 되려면 생계비를 우선 낮춰줘야 한다. 주거, 교육, 양육에 드는 돈 말이다. 이건 경제정책 몫이다. 그런데 기획재정부, 국토부, 교육부 수장들은 수수방관, 남의 일이다. 남북관계팀이 발휘한 팀워크 2할만 보여줘도 미책(美策)이 졸책(拙策)으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민은 실험 대상이 아니다. 졸책 전락, 급기야 대참사로 끝나 남북회담의 놀라운 성과를 다 까먹을 위험을 막을 시간과 방법은 아직 있다. 청와대가 고집 피우기를 일단 중단하고, 부문별 특성에 따라 유연근무제와 탄력근무제를 허용하는 일이다. 밤낮 없는 연구전문직, 복지서비스 등 특례업종을 조금 더 늘려주고, 최하위 소득계층 10%에 한해 8시간 연장근로를 더 허용하면 된다. 100인 미만 중소 사업장은 사정에 따라 노사합의로 근로시간을 결정하되 탄력적 근무 적용 시한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하기를 바란다. 미국, 일본, 독일이 그런 유연성을 발휘하는 나라다. 정책의 퇴색도 아니고 정책 의의를 손상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 같은 ‘막무가내 고!’가 ‘52시 정신’을 더 빨리 훼손한다.

한국의 노동열차가 ‘52시 역(驛)’에 멈춰 섰다. 하층 임금 노동자와 중소 상공인을 싣고 유럽으로 향할지, 아니면 허드렛일로 가득 찬 만주대륙으로 갈지 예측 불허다. 유럽행을 원한다면 길은 있다. 청와대가 현장의 절규를 들어보면 된다. 다 쓰러진 다음에는 약(藥)도 없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