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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후’ 늘어나지만 ‘더빙’ 줄어드는 안방극장…사라지는 추억의 목소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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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피스 다음 이야기! 죽음의 키스, 사황 암살작전 개시! 나는 꼭 해적왕이 될 거야!”

지난달 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애니원' 방송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애니메이션 원피스 더빙작업에 성우 강수진·소연 씨등 20여명의 연기자들이 참여했다. 최규진 기자

지난달 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애니원' 방송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애니메이션 원피스 더빙작업에 성우 강수진·소연 씨등 20여명의 연기자들이 참여했다. 최규진 기자

지난달 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애니원’의 스튜디오. 녹음실 안에서는 인기 애니메이션 <원피스 시즌 21기>의 더빙 작업이 한창이었다. 주인공 '루피' 강수진부터 ‘로빈’ 소연 등 익숙한 목소리의 성우 20여명이 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때로는 호탕하게 웃음을 짓기도 하고, 땅이 꺼질세라 우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다음 편이 기다려지는 예고편에 감칠맛을 더해 주는 것도 성우의 역할이다.

성우들을 가리켜 흔히 ‘천의 목소리를 가진 직업’이라고 말한다. 얼굴을 철저히 감추고 목소리로만 모든 것을 표현한다. 이날 건네받은 대본 위에는 밑줄과 함께 표정까지 그려져 있었다. 이다은 성우(28)는 “성우들끼리 맡은 배역을 잘 소화하기 위해 그려놓은 것”이라며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자신의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성우들은 자신의 연기 포인트를 강조하기 위해 대본에 밑줄이나 캐릭터 그림을 그려놓은 모습. 최규진 기자

성우들은 자신의 연기 포인트를 강조하기 위해 대본에 밑줄이나 캐릭터 그림을 그려놓은 모습. 최규진 기자

◇ 지상파 3사 더빙 외화 사실상 '0'편

하지만 성우들의 개성 넘치는 목소리만 듣고 작품 속 배역을 떠올리는 일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성우들의 주 무대인 지상파 방송사가 자막으로 외화를 내보내거나 아예 프로그램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과거 1960~1990년대 초는 성우들의 전성시대였다. 당시에는 KBS '토요명화', '명화극장', MBC '주말의명화', SBS '영화특급' 등 성우들이 더빙한 외화가 안방극장을 책임졌다. 지금도 미국 드라마 ‘맥가이버’, ‘브이’,'전격Z작전', ‘엑스파일’의 대표 성우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1997년 IMF사태 이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우들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상파 3사(KBS, MBC, SBS)에서 외화프로그램은 2014년 이후로 완전히 폐지됐다. ‘시청률 경쟁’과 ‘제작비 부담’ 때문이었다. 케이블, 인터넷, VOD 등이 자리 잡은 데다, 영화시장에서 국산영화가 급성장한 것도 한몫했다. 그나마 라디오 드라마도 편수가 줄었고 재방송이 많아졌다.

실제로 지난 어린이날 연휴 동안 지상파에서 내보낸 특선 영화 중에서 외화를 찾기가 힘들었다. SBS는 외화 애니메이션 ‘넛잡2’를 자막으로 방송했다. 그나마 EBS가 ‘인사이드 아웃’을 재방송된 더빙으로 내보냈다. 한 지상파 PD는 “특선용 특A급의 장편 외화를 구입하려면 배급사에서 패키지로 판매하는 경우가 많아 단가가 5억~10억원까지 치솟기도 한다. 번역료와 성우료 등 추가 제작비 압박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원피스 더빙 현장. 최규진 기자

애니메이션 원피스 더빙 현장. 최규진 기자

◇“성우 채용 줄어드는데…처우는 제자리 걸음”

성우들의 주 무대가 사라진 현상은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 방송을 떠난 성우들의 활동 영역은 케이블 애니메이션, 게임, 광고, 뉴미디어 등으로 더 넓어졌다. 그러나 지상파 더빙 프로그램이 줄어들면서 방송 출연료마저 제자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에는 아예 성우 선발 인원까지 줄어들면서 경쟁도 심해지고 있다.

애니메이션 &#39;원피스&#39; 더빙 현장. 최규진 기자

애니메이션 &#39;원피스&#39; 더빙 현장. 최규진 기자

성우가 되려면 반드시 방송사 공개 채용을 통과해야만 한다. 각 방송사와 2년간 전속 계약이 끝나면 프리랜서로 활동한다. KBS, EBS, 대원방송, 대교방송, CJ 투니버스 등 5곳에서 매년 공채를 선발한다. 매년 방송사를 통틀어 20~30명의 성우를 채용하고 있지만 줄어드는 추세다. 그나마 MBC는 2004년 이후 채용을 하지 않고 있다. 최근 10명 내외의 성우를 뽑는 KBS엔 2500여명의 지망생이 몰렸다.

일부 성우들은 생존권 문제를 거론하기도 한다. 성우들의 수입은 각자 활동이나 몸값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방송사 출연료만큼은 철저히 등급에 따라 받는다. 성우는 10년 차 이후부터 A급(1등급)으로 분류하고 이전은 B등급(2등급)으로 분류한다. 각 방송사에서 입지가 줄어들면서 출연료 협상도 수년째 제자리 걸음 수준이라는 주장이다.

2011년도 이후 유지되고 있는 지상파(KBS) 기준 TV,음성배역 성우 등급에 따른 출연료 조견표 [사진=한국성우협회]

2011년도 이후 유지되고 있는 지상파(KBS) 기준 TV,음성배역 성우 등급에 따른 출연료 조견표 [사진=한국성우협회]

‘짱구 엄마’ 역할로 유명한 강희선 전 KBS 성우극회 회장은 “현재 ’짱구는 못 말려' 시리즈의 주연인 짱구, 엄마, 아빠가 모두 A등급 성우다. 그러나 30분당 출연료는 지상파 기준 세전 14만원, 케이블은 12만원 수준을 받는다”며 “몇몇 스타 성우를 제외하고는 서로 빈부 격차가 심해 함부로 수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지어 성우 대신 유명 연예인이 더빙·내레이션 작업에 참여하는 경우 잦아지면서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한국성우협회에 따르면 협회에 등록된 성우 800여명 정도 중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프리랜서 성우는 100여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1년 내내 일거리가 없어 생계유지가 힘든 이도 많다는 게 협회 관계자의 설명이다.

◇“더빙은 몰입에 방해, 자막 대체해야” vs “더빙은 시청자 위한 배려”

일부 시청자들은 더빙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더빙이 원작을 훼손하는 데다 감상에 방해가 된다는 부정적 인식 때문이다. 외국 배우들의 원어 프로그램에 친숙해진 만큼, 자막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요구도 잇따르고 있다. 결국 지난해 3월 KBS는 영국 드라마 ‘셜록’을 방송하면서 더빙판과 자막판을 둘 다 방송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지상파 방송에서만큼은 우리말 더빙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해외 영상물에 대한 국민의 방송선택권과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다. 김석환 성우(45)는 “디지털 방송 취지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일반 시청자들이 받기 쉬운 형태로 취사선택 가능한 더빙 컨텐트도 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영국 드라마 &#39;셜록&#39; 시즌4.   [사진=BBC Worldwide]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영국 드라마 &#39;셜록&#39; 시즌4. [사진=BBC Worldwide]

더빙에 찬성하는 시청자들은 자막을 읽기 힘든 어린이나 노인, 시각 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지 개인의 취향이라는 이유로 더빙을 폐지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2014년 KBS <명화극장>이 폐지될 때, 한국시각장애인협회는 “소외계층을 배제한 것”이라며 반발했다. 지난 3월엔 “지상파에서 더빙영화를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3000명 이상이 찬성했다.

일각에서는 지상파 방송이 우리말 보호를 위해서라도 더빙에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등 유럽 주요국가들은 자국어 보호를 이유로 더빙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한국성우협회도 지난 2016년부터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에서 외화를 의무적으로 더빙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시청자가 자막과 더빙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다.

이연희 성우협회 이사장은 “우리나라 방송에서 자국어에 대한 보존 의식이 약해지면서 청소년의 언어문화까지 저속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정부 기관의 더빙 지원사업마저 매년 지원금이 줄어들 정도로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 ‘더빙판’ 고집하는 ‘성우 덕후’들도 많아

최근에는 ‘자막판’보다 ‘더빙판’을 사랑하는 마니아도 늘고 있다. 더빙 연기를 펼치는 성우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팬들, 이른바 ‘성덕’(성우 덕후)들이다. 이들은 작품 출시 전부터 캐스팅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정도로 출연작을 일일이 꿰뚫고 있다. 성우들 대신 작품별 DB를 정리해놓기도 한다. 일부 팬들은 아예 오프라인 팬 미팅을 직접 주선하기도 한다.

팬들은 작품을 볼 때 오로지 성우들의 목소리만 본다. 성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면 출연작품과 연기를 모아 동영상으로 편집하고 공유하기도 한다. 네이버에서 8년째 성우 블로그 운영 중인 장진희(24)씨는 “팬들 사이에서는 디카프리오는 강수진, 슈워츠제네거는 이정구여야 한다’는 식으로 전담 성우가 아니면 떠올릴 수 없는 목소리가 있다. 이들이 색다른 목소리로 연기할 때면 늘 설렌다”고 말했다.

성우 팬들이 직접 운영하는 한국 성우 팬 연합커뮤니티 &#39;로드 오브 보이스&#39;의 홈페이지. 최규진 기자

성우 팬들이 직접 운영하는 한국 성우 팬 연합커뮤니티 &#39;로드 오브 보이스&#39;의 홈페이지. 최규진 기자

이들은 더빙을 하나의 장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성우 팬 연합 커뮤니티인 '로드 오브 보이스’를 운영 중인 강훈(35)씨는 ”더빙과 자막을 구분하는 건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는데 달려있다”면서 “‘더빙이 원작을 초월했다’는 표현이 있다. 원작을 존중하면서 더빙을 통해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바꾸는 것도 작품의 매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규진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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