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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만 외국인의 역습…‘관광 공해'멘붕에 빠진 일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 “마이코(舞子·수습과정에 있는 예비 게이샤)에게 사진을 찍자고 부탁할 때는 친절하게 해 주세요. 다다미방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으세요. 다른 곳에서 산 음식을 들고 식당에 들어가지 마세요. 식당 예약 취소는 임박해서가 아니라 미리 미리 해주세요.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지 마세요. 너무 철길에 붙어 기차 사진을 찍으면 위험해요.신사나 사찰에 들어갈때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어주세요.~”

[서승욱의 나우 인 재팬] #민폐 외국인 관광객으로 일본 전체가 몸살 #교토,가마쿠라 주민 극도의 스트레스 호소 #"민폐 안끼친다"는 일본인이라 충격 더 커 #청수사와 금각사 주변은 아예 관광 불능 #땅값 상승,관광 가치 하락으로 위기감 증폭 #"관광 분산 없는 숫자 채우기식 정책이 원인" #6월 민박 자유화되면 혼란 극대화 될 수도

교토시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배부하고 있는 매너 팜플릿

교토시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배부하고 있는 매너 팜플릿

일본 교토(京都)시가 외국인들을 상대로 배포중인 ‘교토 아키마헨(간사이 방언ㆍ이러면 안돼요)’팜플릿에 담겨있는 내용이다.

교토시는 삽화까지 섞어 영어ㆍ중국어판을 만들었다.

'어쩌다 이런 상식적인 매너를 소개하는 팜플릿까지 따로 만들었을까'싶지만 효과는 꽤 괜찮다고 한다. 그만큼 초보적인 예절을 지키지 않는 관광객들이 많다는 뜻이다.

팜플릿을 배포한 뒤엔 관광객들의 민폐가 조금은 줄었다고 한다. '하룻밤 사이에 관광객이 배로 불어난다'는 농담까지 돈다는 일본 간사이(關西)지역의 주민들에겐 외국인 관광객의 증가가 꼭 축복만은 아닌 모양이다.

일요일인 지난 6일 차량이 통제된 긴자 중앙로 '보행자 천국'거리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 서승욱 특파원

일요일인 지난 6일 차량이 통제된 긴자 중앙로 '보행자 천국'거리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 서승욱 특파원

# "샤신오 톳테 모라에마스카(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나요)."
지난 6일 도쿄 긴자(銀座) 츄오도오리(중앙로)에서 마주친 남미 관광객이 기자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긴자의 상징인 와코 백화점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어줬다. 그 다음엔 영국인 커플, 중국인 단체 관광객도 같은 부탁을 해왔다.

휴일의 긴자는 차량이 통제돼 ‘보행자 천국’으로 바뀐다. 그 곳의 절반 이상은 분명 외국인 관광객이다.
깃발을 들고 버스를 내리는 서양인 단체 관광객들도 수두룩하다.

몰려드는 관광객들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번화가’라던 긴자의 명성에도 금이 가고 있다.
고급 상점앞 대리석 조형물엔 ‘여기에 앉지 마시라’는 경고문이 중국어·영어·일본어로 써 있다.

또 과자 봉지 하나 찾기 어렵다던 2010년대 초반까지의 긴자 거리와는 청결 상태도 완전히 딴판이 됐다.

지난 7일 단체 버스에 오르려 줄을 늘어선 긴자 거리의 외국인 관광객들.서승욱 특파원

지난 7일 단체 버스에 오르려 줄을 늘어선 긴자 거리의 외국인 관광객들.서승욱 특파원

2869만명. 2017년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의 숫자다.
2011년 622만명에서 무려 5배에 가깝게 늘었다. 2012년 말 재집권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관광 진흥을 아베노믹스의 간판 사업으로 내걸고 필사적으로 덤벼 든 결과다.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의 유치 목표는 4000만명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하지만 머릿수에만 초점을 맞췄던 아베식 관광 입국 정책이 요즘 제대로 부메랑을 맞고 있다.
관광객들로 인한 일본 국민들의 생활 스트레스가 일상화되면서 ‘관광 공해’라는 말은 일반명사가 됐다.
 한 해에 외국인 관광객 700만명이 몰리는 유서깊은 교토, 전 세계 도시들중 관광객 숫자가 가장 빠르게 불어난다는 오사카(大阪), 여기에 고베(神戸)와 나라(奈良)까지 몰려있는 간사이 지방을 필두로 홋카이도(北海道)와 간토(關東)지방 등 일본 전역이 ‘관광 공해’의 사정권이다.

지난 7일 평일임에도 긴자 중앙로 교차로엔 외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났다. 서승욱 특파원

지난 7일 평일임에도 긴자 중앙로 교차로엔 외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났다. 서승욱 특파원

주민들의 일상이 눈에 띄게 피폐해졌다. 쓰레기가 폭증하고, 전철ㆍ지하철안이 시끄러워지고, 평소 다니던 집 앞의 동네 식당이 관광 명소로 바뀌어 북새통이 되는 건 이미 뉴스가 아니다.

시내 버스와 전철은 관광객이 접수했다. '전체 인구는 17만,한 해 관광객은 2000만(내국인 포함)' 이라는 도쿄 인근 가마쿠라(鎌倉)시 시민들에겐 해변을 따라 운행하는 전철 에노덴(江ノ電)타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주말이면 역 안에 들어선 뒤에도 무려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 가마쿠라시는 관광객 보다 먼저 지역 주민들을 전철에 우선 승차시키는 실험까지 했다.

관광객들로 인해 만원 버스가 일상화된 교토에선 출근시간대의 회사원들이 버스를 못 타 발을 동동거리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버스 요금을 100엔 올리고 대신 지하철 요금을 낮춰 관광객을 전철로 유도하기도 했지만 효과는 아직이다.

지난 2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관광객들이 일본 가마쿠라시 '가마쿠라 고교역'에서 만화 '슬램덩크'의 배경이 된 학교 주변과 이곳을 지나는 전철 에노덴을 찍고 있다. 서승욱 특파원

지난 2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관광객들이 일본 가마쿠라시 '가마쿠라 고교역'에서 만화 '슬램덩크'의 배경이 된 학교 주변과 이곳을 지나는 전철 에노덴을 찍고 있다. 서승욱 특파원

외국인들이 모는 렌터카 사고가 크게 늘면서 오키나와에선 경찰이 "한국어와 중국어를 쓰는 사람에겐 차를 빌려주지 말라"고 렌터카 업체에 요청했다가 물의를 빚었다.

황당한 사례도 많다. 교토에선 관광객들이 레스토랑에서 식사중인 옆 손님의 음식을 맛보고 "같은 걸로 달라"라고 주문하고, 음식을 먹던 손으로 거리를 지나던 마이코의 몸과 기모노를 만지는 일도 흔하게 벌어진다고 한다.

사슴들이 많은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앞에선 사진을 함께 찍으려 사슴들을 괴롭히다 물리는 관광객들도 늘어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후지산 주변은 변기에 쓰레기를 버리는 관광객들때문에 홍역을 앓고 있다.

고급 숙박시설이나 식당들은 예약을 펑크내는 관광객들 때문에 고민이다.

 홈페이지에서 아예 외국어 소개를 빼거나 외국인들의 예약을 거절하고, 까다로운 조건에서만 예약을 받는 업소들이 늘어나고 있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메이와쿠(迷惑·폐)를 끼쳐선 안된다"는 가르침을 심신에 체득해온 일본인들이기에 관광 공해의 충격을 더 크게 느낀다는 분석도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건 단지 일상생활의 불편뿐만 아니라 관광지로서의 가치까지 위협받는 사례들이다.

교토의 기요미즈데라(清水寺·청수사)와 긴가쿠지(金閣寺·금각사) 등 유명 사찰, 가마쿠라 지역의 한적하고 일본스러운 정취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새벽 이른 시간이 아니면 관광객에 휩쓸려 제대로 감상하기 조차 불가능하다.

간사이 일부 지역의 경우에는 땅 값 버블 현상이 벌어지면서 그동안 해당 도시의 관광 중추로 역할해왔던 상점가와 커뮤니티가 붕괴되는 공동화 위기까지 맞고 있다.

그 결과 "관광지로서 일본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그동안 일본 문화에 끌려 방문했던 충성도 높은 외국인들까지 이제 일본을 찾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전문가들은 숫자에 집착하는 일본 정부의 관광 정책이 ‘관광 공해’를 부른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관광 입국을 내세우면서도 외국인 관광객들의 선호나 소비 패턴 등에 대한 상세한 데이터 분석이 뒷받침 되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게다가 허가제였던 민박이 신고제로 풀리는 ‘민박 해금'정책이 6월 중순 실시되면 "싸구려 민박집에 외국인들이 몰리면서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극에 달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일본 정부는 민박 금지 해제를 ‘외국인을 더 끌어오는 신의 한 수’라고 꼽지만, 주민들에겐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난 6일 긴자 중앙로의 '보행자 천국'거리를 걷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 서승욱 특파원

지난 6일 긴자 중앙로의 '보행자 천국'거리를 걷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 서승욱 특파원

관광 공해의 해법으로 거론되는 건 ‘관광객들의 분산’이다.
관광경영론이 전공인 다카사키게이자이(高崎經濟)대 이카도 다카오(井門隆夫) 교수는 최근 아사히 신문 기고에서 "관광은 향후 일본의 경제성장을 위해 유망한 산업"이라며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효과적인 관광객 분산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을 처음 찾는 관광객들은 유명 관광지에 몰릴 수 밖에 없지만 이들이 두 번째 세 번째도 계속 같은 곳을 찾지는 않을 것"이라며 "단골 관광객들을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관광객 분산을 위해선 지역간 관광 불균형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동안 관광객들이 몰리지 않았던 지역의 인프라 건설에 정부가 예산을 쏟아붓는 전략적 투자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근 돗토리(鳥取)현과 시마네(島根)현의 경제단체가 의기투합해 공동 관광 루트 개발과 홍보에 나선 것처럼 상대적으로 관광 인프라가 뒤쳐진 지역들간의 연계 전략도 중요하다.

하지만 관광객 분산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관광 진흥과 관광 공해 사이에서 정답을 찾아야 하는 고민이 일본 사회를 당분간 괴롭힐 것 같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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