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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엘리엇의 7200억 요구에 따로 노는 정부 부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83호 34면

지난달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한국 정부에 제출한 투자자-국가소송(ISD) 중재의향서 내용이 어제 공개됐다. 엘리엇이 중재의향서를 낸 것도, 정부가 원문 내용을 전부 공개한 것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것이다.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의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국민연금에 압력을 넣어 합병에 찬성하게 함으로써 삼성물산 주주였던 자신들이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엘리엇이 중재의향서에 적시한 피해보상 청구 금액은 6억7000만 달러(약 7200억원)였다.

엘리엇은 또 어제 현대자동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주총에서 반대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과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자료까지 만들어 배포했다. 외국인 주주를 상대로 여론전을 펼치겠다는 전략이다.

엘리엇이 한국 정부와 대기업의 약한 고리를 사정 없이 파고들고 있다. 엘리엇을 이익만 노리는 무자비한 벌처펀드라고 비난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엘리엇의 ISD는 한국 정부의 검찰 수사와 법원 판결을 근거 자료로 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재판 결과를 비롯해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의 국민연금 관련 재판을 거론하며 한국 정부의 부정부패와 부당한 차별로 손해를 봤다고 주장한다. 지난 정권의 잘못을 바로잡는 적폐청산이 정의 구현이라는 명분을 챙겼는지는 몰라도 자칫하면 값비싼 대가를 치를 수도 있게 됐다.

이런 와중에 복지부 적폐청산위원회는 지난달 국민연금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을 ‘청산해야 할 적폐’로 꼽았다. 아직 국민연금 관련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정부가 앞장서서 엘리엇의 ISD 소송을 부채질한 격이다. 이런 게 바로 진짜 적폐인 ‘칸막이 행정’ 아닌가. 청와대도 각 부처의 일을 일일이 간섭하고 참견하기보다 미리 부처 간 업무 조정을 통해 이런 불협화음이 나오지 않도록 막는 게 제 역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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