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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뒷골목에서 진짜 터키의 향기를 맡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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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정확히 10년 만이다. 처음 이스탄불을 찾았을 땐 터키가 자랑하는 명소, 이를테면 아야 소피아·블루모스크·톱카프 궁전 같은 유적을 둘러봤다. 이번엔 아니었다. 이스탄불의 일상을 보고 싶었다. 호객꾼 들끓는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 냄새 풍기는 뒷골목이 궁금했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풍경을 만나고 싶어 100년도 전에 세워진 호텔에 머물렀고, 신과의 합일을 꿈꾸는 오래된 춤을 지켜봤다. 서울처럼 역동적이고 혼란스러운 도시 이스탄불에 다시 한 번 깊게 매료됐다.

갈라타 탑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이스탄불 도심. 갈라타 다리를 건너면 아야 소피아, 톱카프 궁전 같은 이스탄불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많지만 골목골목을 누비며 현지인의 일상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갈라타 탑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이스탄불 도심. 갈라타 다리를 건너면 아야 소피아, 톱카프 궁전 같은 이스탄불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많지만 골목골목을 누비며 현지인의 일상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3시간 먹는 터키식 아침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착륙한 시간은 오전 5시. 미명을 헤치고 프로 축구팀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베식타스(이스탄불 연고의 다른 두 축구 팀은 갈라타사라이와 페네르바흐체)로 향했다.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주택가에 차가 멈췄다. 연립주택 2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옅은 레몬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오즐렘 바탈(38)이 반갑게 맞아줬다.

오전 내내 먹는 주말 아침 밥상 #터키 건국의 아버지가 묵은 호텔 #신 맞이하는 800년 전통 춤사위

새벽부터 불쑥 현지인 집을 찾아간 건 터키식 아침식사 때문이었다. 거하게 먹기로 소문난 터키인의 주말 아침 밥상이 궁금했는데 마침 기회가 생겼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바탈이 주한터키대사관을 통해 한국인을 초대했기 때문이다. 바탈은 여행사 ‘터키 트래블 그룹’에서 일하고 있다.

이스탄불 베식타스 지역의 소문난 빵집 '오타쿄이 피리니(Ortakoy firini)'. 제빵사가 새벽부터 빵을 굽고 있다.

이스탄불 베식타스 지역의 소문난 빵집 '오타쿄이 피리니(Ortakoy firini)'. 제빵사가 새벽부터 빵을 굽고 있다.

바탈과 함께 장 보러 나갔다. 집 근처 빵집부터 찾았다. 호텔과 레스토랑에 빵을 공급하는 24시간 빵집이어서 새벽인데도 제빵사들이 분주했다. 참깨를 잔뜩 뿌린 터키식 베이글 ‘시미트’와 바게트와 비슷한 ‘에크멕’을 잔뜩 샀다. 이어 청과점에서 허브와 채소를, 디저트 가게에서 터키 국민 간식 ‘바클라바’를 샀다.

다시 바탈의 집. 곧 ‘카흐발트(Kahvalti)’라는 정통 터키식 아침상이 차려졌다. 지중해식 식사답게 올리브와 치즈가 5종씩 나왔다. 푸릇한 채소와 새빨간 과일, 토마토·소시지·계란을 함께 볶은 ‘메네멘’까지. 보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터키인의 아침식사 카흐발티. 터키 사람들은 주말이면 가족, 친구와 함께 이렇게 거한 아침을 먹는다. 건강한 지중해식답게 다양한 치즈와 올리브가 올라온다.

터키인의 아침식사 카흐발티. 터키 사람들은 주말이면 가족, 친구와 함께 이렇게 거한 아침을 먹는다. 건강한 지중해식답게 다양한 치즈와 올리브가 올라온다.

“‘차이(터키식 홍차)’가 없다면 진짜 아침이 아니지.”
식사 준비를 마친 바탈이 차이 끓는 주전자를 들고 왔다. 허리가 잘록한 투명 잔에 옅은 레드와인 빛깔의 홍차를 따라줬다. 식사를 시작했다. 눈이 번쩍 뜨이는 음식은 없었지만, 음미할수록 맛있었다. 평소 즐겨 먹지 않았던 올리브와 홍차 맛에 감탄하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터키인은 주말이면 이렇게 친구, 가족과 함께 서너시간씩 아침을 먹으며 수다 떠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단다.

식사를 마친 뒤 터키 커피를 맛봤다. 곱게 간 원두를 물에 넣고 끓여 걸쭉하다.

식사를 마친 뒤 터키 커피를 맛봤다. 곱게 간 원두를 물에 넣고 끓여 걸쭉하다.

터키인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면 이런 ‘집밥’은 맛보기 힘들다. 카흐발트 전문 식당을 가거나 조식 뷔페가 훌륭한 호텔에서 묵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다. 다행히 2박을 묵은 페라 팰리스(Pera palace) 호텔의 조식이 근사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낳은 호텔

사실 페라 팰리스는 이스탄불의 문화유산 같은 호텔이다. 1889년 파리와 이스탄불을 잇는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개통하자 유럽 관광객이 본격적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당시 이스탄불에는 유럽의 귀족이 묵을 만한 현대식 호텔이 없었다. 유명 건축가였던 알렉산더 발라우리가 오스만 거부(巨富)의 의뢰를 받아 페라 팰리스 호텔을 설계했고 1895년 문을 열었다. 이스탄불에 목조건물이 대부분이던 시절, 페라 팰리스는 전기 엘리베이터와 온수시설을 최초로 도입한 초호화 시설이었다.

터키 최초의 현대식 호텔 '페라 팰리스'에는 수많은 유명인이 묵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411호 객실에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썼다. [사진 페라 팰리스 호텔]

터키 최초의 현대식 호텔 '페라 팰리스'에는 수많은 유명인이 묵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411호 객실에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썼다. [사진 페라 팰리스 호텔]

로비로 들어가는 나무 회전문부터 세월이 느껴졌다. 에브루 아야스 매니저와 함께 호텔 투어에 나섰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101호. 호텔에는 115개 객실이 있는데 이 방만큼은 손님을 받지 않는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를 기리는 공간이어서다. 아타튀르크는 1917년 처음 이 방에 2주간 묵었고 이후로 스무 번 넘게 찾아왔다. 객실은 그가 좋아한 분홍색으로 꾸몄고, 여러 유품도 전시했다. 아야스는 “이 객실이야말로 우리 호텔의 자랑”이라며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천정을 올려다보며 ‘헬로! 아타튀르크’ 하고 인사한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방은 411호. ‘애거사 크리스티 룸’이다. 영국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1890~1976)가 1926년부터 32년까지 자주 묵었다는 방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이 방에서 쓴 것으로 추정한다. 그녀가 쓰던 타자기와 객실 키, 일기장이 전시돼 있다. 단골이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레타 가르보 이름을 단 방도 있다.

페라 팰리스 호텔은 '애프터눈 티'도 유명하다. 약 2만7000원으로 마카롱과 샌드위치, 홍차 등을 맛볼 수 있다.

페라 팰리스 호텔은 '애프터눈 티'도 유명하다. 약 2만7000원으로 마카롱과 샌드위치, 홍차 등을 맛볼 수 있다.

터키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93세의 피아니스트 일험 겐서. 페라 팰리스 호텔 로비 라운지에서 애프터눈 티 시간에 그의 공연을 볼 수 있다.

터키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93세의 피아니스트 일험 겐서. 페라 팰리스 호텔 로비 라운지에서 애프터눈 티 시간에 그의 공연을 볼 수 있다.

호텔에 머문다면 로비 라운지에서 애프터눈 티도 맛봐야 한다. 약 2만원으로 마카롱과 홍차 등을 즐길 수 있지만 무엇보다 93세의 피아니스트 겸 가수 일험 겐서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오후 3시 익숙한 옛 재즈음악을 연주하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꼬레?”라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 이내 아리랑을 연주했다. 살롱에 있던 사람들이 겐서의 연주에 맞춰 춤을 췄다.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 춤

이슬람 선각자인 메블라나 루미가 고안한 세마 댄스는 고도의 상징이 담긴 종교의식이다. [사진 호자파샤 문화센터]

이슬람 선각자인 메블라나 루미가 고안한 세마 댄스는 고도의 상징이 담긴 종교의식이다. [사진 호자파샤 문화센터]

이스탄불 거리 곳곳에서 춤 추는 사람들을 봤다. 보르포러스 해협을 떠다니는 디너크루즈에서는 벨리댄스 같은 민속춤도 봤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중세 목욕탕을 개조한 호자파샤(Hodjapasha) 문화센터에서 본 ‘세마(Sema) 댄스’였다. 이슬람 신비주의 교파 수피즘의 선각자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1207~73)’가 만든 춤이다. 사실 세마는 고도의 종교의식이다. 복장부터 사소한 손놀림까지 깊은 상징이 담겨 있다.

다소 음산한 분위기의 공연장. 검은 망또를 입고 골무 모양의 모자를 쓴 남자 다섯명이 원형 무대 위에 섰다. 곧 망또를 벗고 큰절을 하더니 시계 반대방향으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머리는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왼손바닥은 땅을 향하고 오른손바닥은 하늘을 향했다. 하늘의 은총을 받아 땅으로 흘리는 의미란다. 세마를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 춤”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만했다.

쉼없이 회전하는 댄서는 무아지경 속에서 신과의 합일을 꿈꾼다. 엄숙한 종교의식이어서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사진 호자파샤 문화센터]

쉼없이 회전하는 댄서는 무아지경 속에서 신과의 합일을 꿈꾼다. 엄숙한 종교의식이어서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사진 호자파샤 문화센터]

사실 1시간 동안 빙글빙글 도는 다섯 남자를 보는 건 그다지 재미난 경험은 아니었다. 관객 중 상당수가 꾸벅꾸벅 졸았다(나도 졸았다). 그러나 끊임없이 회전하는 무아지경 속에서 신과의 합일을 꿈꾸는 마음을 생각하니 숙연해졌다. 갈수록 빨라지며 휘몰아치는 음악도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휘감았다.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은 『발칙한 유럽산책』에서 “이스탄불에서 가장 괴로운 건 모든 음식점과 택시에서 흘러나오는 전통악기 연주 소리”라고 했지만 춤과 어우러진 음악은 아름다웠다. 특히 가야금처럼 생긴 ‘카눈’ 소리는 지금까지도 귓가에 맴돈다.

수피즘의 선각자 루미는 정통 이슬람에서 이단 취급을 받는다. 신비주의를 추구해서다. 그러나 그가 쓴 시편과 잠언은 종교를 초월해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이 애송한다. 문학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화해와 관용의 메시지가 마음을 울려서다. 세마 공연에서는 가수들이 코란 뿐 아니라 루미의 시편도 낭송한다. 그 아름다운 시구가 귀에 담겼다면 공연에 더 몰입할 수 있었으리라 잠시 생각했다.

‘모든 것인 당신이여, 내가 누군지 말하라/내가 당신이라고 말하라’ -‘내가 당신이라고 말하라’ 부분

터키인은 커피보다 차이(터키식 홍차)를 즐겨 마신다. 골목마다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차이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이스탄불은 개와 고양이의 천국이다. 어디를 가나 길바닥에 누워있는 큼직한 개와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고양이를 볼 수 있다. 탁심 광장 인근에서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는 고양이 다섯 마리.
이스탄불을 여행한다면 보스포러스 해협이 잘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해봐야 한다.

여행정보

터키항공(turkishairlines.com)이 인천~이스탄불 노선을 주 11회 취항한다. 운항 스케줄이 이스탄불 여행에 편리하다. 인천공항에서 오후 10시 35분 또는 11시 55분에 출발하면 이스탄불에 이튿날 오전 4시 30분, 또는 5시 5분에 도착한다. 이스탄불에서는 오후 8시 45분과 오전 1시 15분에 출발한다. 비행시간은 갈 때 12시간, 올 때 12시간 걸린다. 페라 팰리스 호텔(perapalace.com) 2인실은 20만원 수준이다. 호자파샤(hodjapasha.com/en) 세마 공연은 어른 24달러다.

이스탄불(터키)=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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