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비핵화 즉각 보상 없는 ‘남아공 모델’에 열받았나

중앙일보

입력 2018.05.09 01:12

업데이트 2018.05.09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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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과 미국 간 정상회담 논의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

북·중 회담 부른 북·미 난기류
북, 미국이 요구한 PVID 방식 난색
풍계리 사전 검증도 의견조율 안 돼
“적절한 보상, 절충형 모델 가능성”
빅터 차 “이견 계속 땐 회담 연기 우려”

“김정은은 매우 열려 있고 훌륭하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만나면 잘 통할 것 같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며 서로를 치켜세우던 ‘칭찬 모드’에서 지난주 후반을 기점으로 돌연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임박했다고 예고했던 북·미 정상회담 장소와 날짜 발표도 지연되고 있다.

여기에 중국 다롄에서 북·중 정상이 전격 회동한 사실이 8일 공개됐다. 일련의 상황은 미국과 북한의 협상 마찰이 심상치 않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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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북·미 양측 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샅바싸움 성격의 신경전일까, 아니면 물밑에서 정말 뭔가 틀어지고 있는 것일까.

워싱턴에 있는 복수의 소식통의 전언을 종합하면 크게 세 가지 난기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먼저, 북한의 핵 폐기 방식이다. 지난 4일 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매슈 포틴저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은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 등에게 “남아프리카공화국 모델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동안 존 볼턴 NSC 보좌관이 주장했던 리비아 방식이 아닌 남아공 방식을 택했다는 건 어떤 면에선 현실적이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선 백악관 핵심에서 초강경 기류가 형성됐음을 뜻한다.

남아공은 1975년 쿠바군의 앙골라 주둔 등 안보 위협, 흑백 인종차별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에 대한 반발, 지도력 결속 필요성 등을 이유로 핵폭탄을 개발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에 따라 안보 환경이 개선되고 국제사회의 제재 압박이 강해지자 93년 핵 포기를 선언했다. “국제사회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위해 핵무기를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남아공은 고농축우라늄(HEU) 기반 핵폭탄을 6개 보유하고 있었다. 남아공은 모든 핵무기 및 HEU 관련 시설 해체→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협정 체결→IAEA 사찰→핵 포기 완료 선언의 수순을 밟았다. 남아공의 핵 포기 선언부터 핵 포기 완료까지 전체 과정엔 2년 반 걸렸다. 비교적 단기간에 이뤄진 셈이다.

남아공은 트럼프 행정부가 강조하는 핵심 요소, 즉 ▶자발적 비핵화 ▶최단 시간 내 신속한 핵 폐기 ▶핵무기 개발 완료 후 자진 폐기 등을 달성한 유일한 사례였던 것이다. 트럼프 정부에서 남아공 모델이 급부상하고 있는 이유다.

다만 이 과정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남아공의 자발적 핵 포기에 대해 경제적 보상이 없었다는 점이다.

반면에 리비아 방식은 단적으로 ‘선(先)조치, 후(後)보상’이다.

따라서 남아공 모델을 검토한다는 것은 북한의 핵 포기에 대한 경제 지원은 한국과 일본, 혹은 국제기구의 몫으로 돌리되 미국은 체제 보장과 같은 안전보장 카드만 내밀겠다는 의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용섭 국방대학교 교수는 “여러 언론에서 미국이 리비아식 해법을 생각한다고 했지만 진짜 염두에 둔 건 남아공 모델이었던 것 같다”며 “핵무기 개발 초기 단계였던 리비아와 달리 남아공은 핵보유국에서 비핵 국가가 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한 교수는 북한이 갖고 있는 핵의 규모가 남아공보다 훨씬 크고 발전돼 있는 만큼 아무런 보상 없이는 협상이 힘들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절충형 남아공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어찌 됐건 미국은 신속한 자발적 핵 폐기를 의미하는 ‘남아공 모델’을 북한에 요구하고 있고, 이에 북한이 반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둘째, 기존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를 변형한 PVID(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와 더불어 미사일과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까지 북·미 정상회담의 의제로 올리려는 미국에 북한이 난색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백악관 NSC 관계자는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는 PVID냐”는 질문에 “그렇다. 기존 CVID에 탄도미사일과 기타 분야들이 더해질 것”이라고 답했다. 한국 정부 내에선 “CVID와 PVID나 다를 게 없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미국에선 다르게 해석하는 목소리가 많다.

1994년과 2007년 영변 핵시설 사찰을 주도했던 올리 헤이노넨 IAEA 전 사무차장은 8일(현지시간) 미국의 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PVID는 CVID와 매우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 비핵화에 농축활동 금지까지 포함된다면 북한은 앞으로 영구적으로 농축시설을 가질 수 없게 된다”며 “반면에 이란 핵 합의(에서의 CVID)는 우라늄 농축 부분은 영구적인 금지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이란 핵 합의보다 더 강력한 사찰을 북한에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 사찰 방식에 대한 이견이다. 미국은 IAEA를 포함한 사찰단이 언제든 핵 의심 시설을 조사할 수 있는 불시사찰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closing)의 방법을 두고 ‘선(先) IAEA의 철저한 사전 검증, 후(後) 폐기’를 요구하는 미국과 이에 반대하는 북한의 의견 조율이 맞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북한이 당장 이달 중 폐쇄하겠다고 약속한 풍계리 핵실험장 처리는 북한 비핵화 조치의 첫걸음이다. 그런 만큼 철저한 사전 검증을 한 뒤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게 미국의 강력한 요구다.

한편 이날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포럼에서 빅터 차 한국석좌는 “(북·미 정상회담의) 장소와 시기 발표를 둘러싼 논의가 길어지면 아예 회담 자체가 연기되거나 취소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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