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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는 이 호텔 411호에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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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이스탄불)는 모든 것이 너무나 노후되었다. 낡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구식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유행에 뒤떨어졌다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노후되었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묵이 한 말이다. 아야 소피아나 톱카프 궁전 같은 중세 건축물을 봐야만 이 말을 수긍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큼직한 개가 길바닥 곳곳에 벌렁 누워 있는 모습이나 일회용 종이컵을 쓰지 않고 작은 유리컵에 차이(터키식 홍차)를 마시는 사람들만 봐도 그렇다. 이스탄불에는 노후해서 매력적인 호텔도 있다. 1895년 문을 연 페라 팰리스(Pera palace) 호텔 이야기다.

[내가 사랑한 호텔] 이스탄불 페라 팰리스 #1895년 개장, 터키 최초 현대식 호텔 #오리엔트 특급 열차 손님 위해 건축 #터키 국부 아타튀르크, 헤밍웨이도 단골

터키 이스탄불 최초의 현대식 호텔인 페라 팰리스에는 수많은 유명인이 묵었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는 411호 객실에 머물며『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썼다. [사진 페라 팰리스 호텔]

터키 이스탄불 최초의 현대식 호텔인 페라 팰리스에는 수많은 유명인이 묵었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는 411호 객실에 머물며『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썼다. [사진 페라 팰리스 호텔]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다. 당시 이스탄불에는 유럽 관광객이 본격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889년 파리와 이스탄불을 잇는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개통하면서다. 한데 이스탄불에는 유럽 귀족이 묵을 만한 현대식 호텔이 없었다. 오스만의 거부였던 예사얀 가문은 유명 건축가인 알렉산더 발라우리에게 호텔 건축을 맡겼다. 1892년 건축을 시작해 3년 뒤인 1895년부터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에 들어선 최초의 현대식 호텔이었다. 목조건물이 대부분이던 당시, 전기 엘리베이터와 온수시설을 최초로 도입한 초호화 시설이었다.

호텔에는 이스탄불 최초로 도입한 전기 엘리베이터가 있다. 지금도 구동 중이다. [사진 페라 팰리스 호텔]

호텔에는 이스탄불 최초로 도입한 전기 엘리베이터가 있다. 지금도 구동 중이다. [사진 페라 팰리스 호텔]

지난 4월 7일, 호텔에 도착했다. 로비로 들어가는 나무 회전문부터 오래 묵은 세월이 느껴졌다. 로비에서 체크인을 마친 다음, 역시 나무와 철로 만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올라갔다. 호텔은 2006~2010년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거쳤는데 이렇게 일부러 남겨둔 옛 시설이 많았다.
에브루 아야스 매니저와 함께 호텔 투어에 나섰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101호. 호텔에는 115개 객실이 있는데 101호만큼은 손님이 묵을 수 없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를 기리는 박물관처럼 쓰고 있다. 아타튀르크는 1917년 처음 이 방에 2주간 묵은 뒤, 스무 번 넘게 찾아왔단다. 객실은 그가 좋아한 분홍색으로 꾸몄고, 다양한 유품을 전시해뒀다. 아야스는 “이 객실이야말로 우리 호텔의 자랑”이라며 “이 방을 찾을 때마다 천정을 올려다보며, ‘헬로, 아타튀르크!’ 하고 인사한다”고 말했다. 아타튀르크에 대한 아야스의 설명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가 묵었던 101호. 그가 사용하던 가구와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최승표 기자

터키 건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가 묵었던 101호. 그가 사용하던 가구와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최승표 기자

터키 국민이 아니어서 그 심정을 헤아리긴 어려웠지만 이런 객실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웠다. 다음으로 찾아간 방은 411호, 애거사 크리스티 룸. 영국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1890~1976)는 1926년부터 32년까지 이 방에 자주 묵었다고 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여기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방 안에는 그녀가 쓰던 타자기와 객실 키, 일기장이 전시돼 있다.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 미국 배우 그레타 가르보(1905~90) 이름을 단 방도 있다.

로비 라운지에서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사람들. 최승표 기자

로비 라운지에서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사람들. 최승표 기자

영국의 호화 애프터눈 티가 부럽지 않다. 마카롱과 샌드위치, 다양한 쿠키를 맛볼 수 있다. 터키식 홍차인 차이의 맛은 설명 불가. 최승표 기자

영국의 호화 애프터눈 티가 부럽지 않다. 마카롱과 샌드위치, 다양한 쿠키를 맛볼 수 있다. 터키식 홍차인 차이의 맛은 설명 불가. 최승표 기자

호텔에는 작가의 이름을 붙인 애거사 레스토랑, 헤밍웨이가 수시로 찾아와 위스키를 마시던 오리엔트 바도 있다. 모두 음식 맛과 분위기가 빼어났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따로 있었다. 로비 라운지 ‘커벨리 살롱(Kubbeli Salon)’이었다. 약 2만원으로 즐긴 애프터눈 티도 훌륭했지만 93세의 피아니스트 겸 가수인 일험 겐서(Ilham Gencer)의 공연이 더 기억에 남는다. 제목은 몰라도 익숙한 올드 재즈뮤직을 연주하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꼬레(한국인)?”라고 물어 고개를 끄덕였더니 이내 아리랑을 연주했다. 살롱에 있던 사람들은 겐서의 연주에 맞춰 춤을 췄다. 피아노를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을 자세히 봤다. 곳곳이 굽어있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는 표정이나 자세만큼은 전혀 흔들림 없었다.

터키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겸 재즈 가수인 일험 겐서. 그는 한국인을 보자 즉석에서 아리랑을 연주했다. 최승표 기자

터키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겸 재즈 가수인 일험 겐서. 그는 한국인을 보자 즉석에서 아리랑을 연주했다. 최승표 기자

페라 팰리스 호텔의 2인실 객실요금은 1박 20만원 수준이다. 조식을 포함하면 1인 약 2만원이 추가된다. 5성급 호텔치고는 비싼 편은 아니다. 기품이 느껴지는 객실과 정갈한 아침식사, 터키식 목욕탕도 만족스럽다. 무엇보다 터키의 근현대 역사를 응축한 호텔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묵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이스탄불 최초의 현대식 호텔인 페라 팰리스는 유럽의 신고전주의와 터키 전통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진 페라 팰리스 호텔]

이스탄불 최초의 현대식 호텔인 페라 팰리스는 유럽의 신고전주의와 터키 전통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진 페라 팰리스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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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터키)=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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