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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탓에 결혼기념일 후배 집으로 부른 대참사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성희의 어쩌다 꼰대(44)

나이 탓일까, 잊어서는 곤란한 일을 깜빡하는 경우가 갈수록 는다. 친구와의 일상적인 약속, 원고 마감 등을 잊어버리는 일이 종종 생기면서 ‘이러다 일내지’ 싶었는데 얼마 전에는 대형 사고를 쳤다.

나이 탓일까? 잊어서는 곤란한 일을 깜빡하는 경우가 갈수록 는다. '이러다 일내지' 싶던 차 대형사고를 쳤다. [중앙포토]

나이 탓일까? 잊어서는 곤란한 일을 깜빡하는 경우가 갈수록 는다. '이러다 일내지' 싶던 차 대형사고를 쳤다. [중앙포토]

십 년도 더 전에 호주에 이민 간 후 페이스북을 통해서나 소식을 주고받던 후배가 전화했다.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어쩐 일이냐 물으니, 한 달 예정으로 귀국한 김에 연락했단다. 이야기를 들으니 내게 ‘볼일’이 있었다. 이민생활의 애환이랄까 노하우를 담은 에세이집을 내고 싶은데 마침 출판사에서 일을 거들고 있는 내가 떠올랐다 했다. 책을 낼 만한지 원고 검토도 해주고 가능하다면 문장도 손봐줬으면 했다.

해서 아무 날 집으로 오라고 했다. 원고 검토야 메일로 파일을 받아 미리 볼 수 있지만 그걸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자면 카페 같은 데보다 집이 편할 것 같아서였다. 무엇보다 모처럼 귀국한 후배에게 집밥을 대접하고 싶었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는데 아내 표정이 심상찮다. ‘아니, 모르는 친구도 아니고, 같은 회사 다닐 때 집으로도 수차례 왔던 후배인데 뭘 그리 까다롭게’ 하는 생각이 들어 의아했다. 한데 한마디 툭 던진다.

“당신, 그날이 무슨 날인지나 아우?” “무슨 날은? 강의 일도 아니고 아무 일도 없는데…” 하다 아차 싶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후배를 부른 날이 결혼기념일이었다. 해마다 챙기곤 했는데 올해는 마눌님 환갑이라는 ‘대행사’가 있어 거기 신경 쓰다 별생각 없이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약속을 잡은 그날이 바로 결혼 기념일이었다. 당일 아내는 손님 치르느라 분주를 떨어야 했다. 그 뒤의 사태며 후유증은.... [중앙포토]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약속을 잡은 그날이 바로 결혼 기념일이었다. 당일 아내는 손님 치르느라 분주를 떨어야 했다. 그 뒤의 사태며 후유증은.... [중앙포토]

그렇다고 출국일이 촉박한 문제의 후배에게 결혼기념일을 이유로 약속을 바꾸기도 미안해 결국 기념일 당일 아내는 손님 치르느라 분주를 떨어야 했다. 그 뒤의 사태며 후유증은…. 길게 이야기 않으련다.

건망증이 대부분 불편하거나 낭패스런 상황을 빚기는 하지만 반드시 부정적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뼈아픈 기억을 잊게 하는 경우가 그렇다.

사표 쓸 때 분한 마음 이젠 누그러져 …'건망증 효과’

평생을 돌이켜보면 길에서 만나면 꼭 한 번 손봐주리라 하는 인간이 두 명 있다. 여기서 자세한 사연이야 들 수 없지만 당시에는 사표를 쓰더라도 때려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분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한데 세월을 이기는 것은 없다 했던가. 지금은 원한이랄까 미움은 옅게나마 남아 있어도 그 당시처럼 밤에 자다가 벌떡 깰 정도는 아니다. 마치 미처 빼내지 못한 가시가 그대로 살이 된 듯 뭉근한 아픔이 느껴지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

이것이 건망증 효과라면 효과다. 모든 것을 생생히, 영원히 기억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우리 삶은 불행 쪽으로 기울지 않을까. 이런 기특한 깨달음도 어제저녁 같은 경우엔 전혀 위로가 안 된다. 샤워 중에 잠깐 딴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샴푸로 머릴 감았는지 안 감았는지 아리송하니 말이다. 이건 급성이라 그런가 중증이라 그런가, 내가 한심하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jaeja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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