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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 교과서용 한자 잘못 읽은 베이징대 총장의 사과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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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 명문대학인 베이징대 린젠화(林建華) 총장이 지난 4일 열린 개교 120주년 기념식에서 중국 중학생용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인 홍곡(鴻鵠·큰 기러기와 고니)을 홍호(鴻浩)로 잘못 읽어 구설에 올랐다. 파문이 커지자 린 총장은 5일 베이징대 인트라넷에 사과문을 올려 학생 시절 경험한 극좌 정치투쟁인 문화대혁명(1966~76)으로 기초 어휘가 부족하다며 진솔하게 사과했다.

린젠화 베이징대 총장

린젠화 베이징대 총장

이번 사건은 지난 4일 베이징대 교정의 추더바(邱德拔) 체육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린 총장의 축사 초반에 벌어졌다. 린 총장은 지난 2일 베이징대를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당대 청년은 홍곡의 뜻을 세우고 분투하는 사람으로 전투 정신을 배양해야한다”는 발언을 인용했다. 그는 “베이징대 학생은 스스로 분발하고 홍곡(鴻鵠·중국식 발음 훙후[hónghú])의 뜻을 세워야한다”고 말할 시점에서 1~2초 가량 머뭇거린 뒤 “홍호(鴻浩·중국식 발음 훙하오[hónghào])”라고 읽어내려갔다. 린 총장은 연설 중 또한 “많은 학생”이란 뜻의 “신신학자(莘莘學子·선선쉐즈[shēnshēnxuézǐ])”까지 “근근학자(斤斤學子·진진쉐즈[jīnjīnxuézǐ])”로 잘못 읽었다. 그러자 중국 네티즌들은 ‘글자도 모르는 총장’이란 뜻의 “백자교장(白字校長)”란 별명을 붙이며 비난했고, 인터넷 쇼핑몰에는 “베이징대학, 홍호지지(鴻浩之志)”라 적힌 티셔츠까지 등장했다.

홍곡→홍호로 잘못 읽어 네티즌 비난 직면 #문혁 탓에 기초 실력 낮다며 진솔하게 사과

큰 기러기와 고니라는 뜻의 홍곡(鴻鵠)은 중국 중학생용 교과서에 나오는 기본 단어로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한자다.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중 ‘진섭세가(陳涉世家)’의 고사에 나온다. 진(秦)제국을 무너뜨리는 농민 반란을 주도한 진승(陳勝)이 같이 일하던 농부에게 “제비나 참새 따위가 큰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燕雀安知鴻鵠之志·연작안지홍곡지지)”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다.

5일 중국 베이징대 도서관 앞에 세워진 개교 120주년 기념 엠블럼에서 졸업생과 자녀가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신경진 기자]

5일 중국 베이징대 도서관 앞에 세워진 개교 120주년 기념 엠블럼에서 졸업생과 자녀가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신경진 기자]

반전은 다음날 일어났다. 린 총장이 교내 인트라넷인 미명(未名·베이징대 교정의 호수 이름) 게시판에 ‘동학에게 보내는 편지’를 올리면서다. 편지에서 린 총장은 “매우 미안하다. 개교 기념 행사 치사 중 홍곡의 발음을 잘못 읽었다”며 “솔직히 정말로 이 글자의 발음을 숙지하지 못했다. 이번에 배웠지만 비용이 무척 비싸다”고 한탄했다. 그는 초중 시절 문혁을 겪으며 정상적인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며 1977년 대학 입학고사에서 어휘와 어법에서 20점을 맞았지만 운이 좋아 베이징대에 합격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사과 편지를 쓴 목적은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고자 함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알리고 싶어서라고 적었다. 문혁 10년 동안 베이징의 지식청년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낸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이 펼쳐졌고 초·중·고·대학 등 모든 교육 과정은 중지됐다.

린젠화 베이징대 총장의 축사 오독 파문 직후 중국 인터넷 쇼핑몰에 등장한 풍자 티셔츠. ‘홍곡지지’ 대신 ‘홍호지지’라는 글자가 북경대학이란 글자와 함께 인쇄했다. [사진=홍콩 명보]

린젠화 베이징대 총장의 축사 오독 파문 직후 중국 인터넷 쇼핑몰에 등장한 풍자 티셔츠. ‘홍곡지지’ 대신 ‘홍호지지’라는 글자가 북경대학이란 글자와 함께 인쇄했다. [사진=홍콩 명보]

린 총장의 해당 축사 영상은 파문이 커지자 중국의 각종 동영상 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SNS)에서 모두 삭제됐다. 하지만 6일 오후부터 문제된 발언이 편집돼 잘린 21분8초 분량의 연설 전체 영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린 총장은 1978년 베이징대 화학과에 입학해 1986년 베이징대 화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독일과 미국 등에서 박사후 과정을 마치고 93년부터 베이징대 화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2010년 충칭(重慶)대 총장에 취임한 뒤 2013년 시진핑 주석이 근무했던 저장(浙江)성의 명문대학인 저장대 총장을 거쳐 2015년 베이징대 총장에 취임했다.

후싱더우(胡星鬪) 베이징이공대 교수는 “지금의 베이징대는 옛날의 베이징대가 아니다”라며 “이런 저급한 잘못은 중국 지식분자의 문화적 소양의 단층과 시대의 비극을 반영한다. 1949년 전과 같이 박학하며 기품있는 학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며 개탄했다.

다음은 린젠화 총장의 사과문 전문

친애하는 동학 여러분
매우 미안합니다. 개교 기념 행사에서 축하 연설 중 ‘홍곡’의 발음을 잘못 읽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정말로 이 글자의 발음을 숙지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배웠지만, 비용은 확실히 무척 비싸네요.
이번 잘못이 많은 동학과 친구를 실망하게 했습니다. 베이징대 총장으로 어휘 기초가 이렇게 낮아서는 안 됩니다. 솔직히 내 문자 기초는 좋지 않습니다. 이번 잘못으로 이 문제가 폭로됐을 뿐입니다.
나의 초중 시절에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교육이 멈췄습니다. 시작된 몇 해 동안 교과서도 없었고 이후 교과서는 있었지만, 무척 단순했습니다. 내가 받은 기초 교육은 완전하지도 체계적이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네이멍구(內蒙古)의 수십 가구에 불과한 작은 농장에서 지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당시 불편함을 상상하기 어려울 겁니다. 농장은 도시에서 수십 ㎞ 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는 마차를 타고 온종일 나가야 할 정도로 멀었습니다. 당시는 지금 같이 발달한 인터넷도 없었고 책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최근 나는 『총장관념-대학의 개혁과 미래』란 책을 냈습니다. 책에서 당시 상황을 언급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됐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수년간 교과서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마오쩌둥) 어록과 노삼편(老三篇·마오쩌둥의 저술 세 편으로 “배쑨을 기념하여”(纪念白求恩), “우공이산”(愚公移山),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爲人民服務)”)만 외우도록 했습니다. 배움에 대한 욕심이 가장 강렬하던 십 대에 다른 책은 없었습니다. 마오쩌둥 선집과 당시 간부 교육용 소비에트 사회주의 교과서만 반복해 읽었습니다. 중국 근현대사 지식도 처음에는 모두 마오쩌둥 선집과 주석에서 얻은 것입니다. 모순론과 실천론을 읽은 뒤 중학교 정치 과목에서 다른 한 편을 배웠을 뿐입니다.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되고 대립을 통일하고, 주요모순과 2차 모순 등, 이들 개념은 줄줄 외웠고 우리 세대의 사상과 관념에 깊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나는 운이 좋아 1977년 대입 어문 과목 중 작문에서 80점을 받았지만, 단어와 어법은 20점에 불과했습니다. 아니었다면 베이징대에 합격하지 못했을 겁니다. 시험 며칠 전에 어법 책 한 권을 읽고 주어와 서술어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어법 개념은 분명하지 않았고 대학 입학 뒤에야 영어를 배우며 무척 고생했습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에게 말하려는 점은 내 무지나 실수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진짜 나를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의 총장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며 결점이 있고 부족하며 잘못을 범한 사람입니다. 또 여러분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 언급한 책을 포함해 모두 내가 쓴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내용과 사상은 모두 여러분이 알아주길 바랍니다.
나는 노력하겠지만 이후 이런 잘못이 또 출현하지 않으리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문자 수련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내 나이의 사람은 짧은 시간 안에 문자 수준에서 큰 진보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진정 나를 실망하게 하고 부끄럽게 한 것은 나의 잘못에만 관심을 불러 치사를 통해 여러분께 알리려던 사상을 홀시하게 만든 것입니다. “간절함과 질의는 가치를 만들지 못합니다. 반대로 미래를 향한 걸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걸음을 미래로 향하게 하는 것은 확고한 믿음, 현실에 직면할 용기와 미래와 직면할 행동입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총장 린젠화.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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