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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세계] 유럽 마지막 반란군 무릎꿇다…바스크 독립투쟁 60년의 반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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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난 죽어도 마드리드에 안 내려!"

영화 '스패니쉬 어페어2'. 스페인 바스크 출신 여자와 세비야 출신 남자의 사랑을 그린 코미디다.

영화 '스패니쉬 어페어2'. 스페인 바스크 출신 여자와 세비야 출신 남자의 사랑을 그린 코미디다.

“마드리드에서 내리라고? 절대 안 돼. 바스크 사람은 마드리드에 한 걸음도 디딜 수 없어!”

스페인 마드리드를 거쳐 바르셀로나로 가려면 환승을 해야 하는데 이걸 어쩝니까. 마드리드 땅을 밟을 수 없다며 기차에서 절대로 못 내리겠다뇨.
단호한 장인어른의 말에 한시가 급한 라파엘(다니 로비라)은 난감하기만 합니다. 전 여자친구 아마야(클라라 라고)의 결혼식장에 찾아가 그녀의 마음을 바꿔놓을 참이거든요.

아마야의 아버지이자 라파엘의 장인, 정확히 말하면 장인이 될 ‘뻔’했던 콜도(카라 엘레할데)는 스페인 북부 지방 바스크 출신 뱃사람입니다. 뼛속 깊이 바스크 사람인 그는 스페인을 단순히 싫어하는 게 아니라 증오하죠. 그런 그에게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바로 ‘적국의 심장’입니다.

라파엘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까요?
(영화 '스패니쉬 어페어2')

#장면 둘: "이게 다 빌어먹을 스페인 때문이야"

ETA 테러리스트를 주인공으로 한 코미디 영화 '이웃집 테러리스트'

ETA 테러리스트를 주인공으로 한 코미디 영화 '이웃집 테러리스트'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한창이던 어느 날, 스페인의 작은 도시.
축구에 열광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곳곳에서 야단법석인데, 마르틴(하비에 카마라)과 그의 동료들은 이상하리만큼 우울합니다.

사실 이들은 바스크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 중인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ㆍ이하 ’에타‘) 소속 테러리스트입니다. 윗선의 명령을 기다리며 무료한 날들을 보내던 중 월드컵이 열린 거죠.
경기 초반, 스페인 팀이 우왕좌왕하자 마르틴이 한 마디 던집니다.

“암, 스포츠는 스페인이 지는 맛에 보는 거지.”

그러나 아아 신이시여 … 스페인은 승리를 거듭하더니 우승을 차지합니다.
자, 이제 마르틴과 동료들은 특급 작전에 돌입합니다. 과연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요?
(영화 ‘이웃집 테러리스트’)

바스크 지역에 있는 도시 빌바오에서 지난달 ETA 정치범 처우를 개선하라며 시위가 열렸다. [AP=연합뉴스]

바스크 지역에 있는 도시 빌바오에서 지난달 ETA 정치범 처우를 개선하라며 시위가 열렸다. [AP=연합뉴스]

지역 간 갈등은 우리나라에도 있는 것 아니냐고요?
단언컨대 이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닙니다.

지난해 스페인 동부 카탈루냐 지역(바르셀로나가 있는 곳이죠)이 들끓었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곳 자치정부 수반 카를레스 푸지데몬이 스페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는데, 중앙정부는 외려 자치권을 빼앗고 그를 반역죄로 기소했거든요. 푸지데몬은 벨기에로 도피했고, 시민들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누구보다 씁쓸한 마음으로 지켜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 두 영화의 주인공인 바스크인들이죠.
이들은 카탈루냐보다 더 오랫동안, 더 격렬하게 독립 투쟁을 해왔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ETA의 활동이 대표적입니다.

영화 '스패니쉬 어페어1'. 얼떨결에 바스크 독립 시위에 참여하게 된 주인공.

영화 '스패니쉬 어페어1'. 얼떨결에 바스크 독립 시위에 참여하게 된 주인공.

그런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ETA의 무장투쟁이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ETA는 2일(현지시간) "완전한 해산"을 공식 선언하고 “희생자와 유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성명을 냈죠. 장장 60년에 걸친 테러로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이들이 이제 역사의 커튼 뒤로 사라진 겁니다.

바스크에선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 일곱 번째 이야기입니다.

스페인 바스크 지역 [사진=두산백과]

스페인 바스크 지역 [사진=두산백과]

스페인을 다녀온 분들께도 바스크는 아마 생소할 겁니다. 여행자들이 찾는 곳은 대개 마드리드(중부)와 ‘가우디의 도시’로 불리는 바르셀로나(동부), 스페인 문화의 정수가 살아있는 안달루시아(남부) 지방이거든요.

바스크는 피레네 산맥을 가운데 두고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에 걸쳐있는 지역입니다만, 근래 들어선 주로 알라바ㆍ 기푸스코아ㆍ 비스카야 주를 일컫는 말이 됐습니다.

이곳의 바스크족은 스페인·포르투갈이 자리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민족입니다. 로마 등 이민족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독자적 언어와 문화를 잃지 않고 살아남았죠.

바스크 지역의 산 후안 데 가스텔루가체.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 유명하다. [사진=구겐하임 미술관 홈페이지]

바스크 지역의 산 후안 데 가스텔루가체.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 유명하다. [사진=구겐하임 미술관 홈페이지]

그렇다고 밖으로 진출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이베리아 반도 어디에서도 이들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거든요.
딱 그 자리에서 자기들끼리 '으샤으샤' 살아온 거죠.
바스크어는 그 어떤 언어와도 다른 특색이 있는데, 어려운 말로는 ‘어떤 어족에도 속하지 않는 계통상의 고립어’라고 하더군요.

아마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이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이들은 산악 민족이면서 동시에 해양 민족인데요. ‘산 사람들’(바스크의 뜻)답게 산악 지형에 걸맞은 문화를 가졌으면서도, 조선업(造船業) 또한 발달시켰습니다. 포경산업(고래잡이)의 중심지이기도 했죠.

이 지역은 바스크 공국에서 팜플로나 왕국을 거쳐 830년 이후 나바라 왕국의 영토였지만, 16세기 이후 스페인 통일 왕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도 바스크만의 고유함은 잃지 않았죠.

영화 '스패니쉬 어페어1'의 한 장면. 주인공의 친구들이 베레모를 쓰고 있는데, 이 모자는 바스크 지역의 전통 모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화 '스패니쉬 어페어1'의 한 장면. 주인공의 친구들이 베레모를 쓰고 있는데, 이 모자는 바스크 지역의 전통 모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이 점점 중앙집권화를 강화하자 바스크 사람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산업혁명 당시 공업지대로 발달해 스페인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는데도 정작 돌려받는 건 없다는 생각에 불만이 커졌죠.

결정적으로 19세기 후반, 스페인 왕에 반기를 든 ‘카를로스 전쟁’에 가담해 패배하며 많은 자치권을 빼앗기고 맙니다.

진짜 위기는 스페인 내전(1936~39) 때 찾아왔습니다.

스페인을 차지하려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에겐 자주적인 바스크가 눈엣가시였거든요. 독일 나치의 힘을 빌려 게르니카 지역을 폭격했는데, 그 처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 ‘게르니카’가 이 비극을 그린 작품입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피카소의 게르니카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바스크를 철저히 탄압했습니다. 수만 명이 수용소에 감금됐죠. 바스크인들은 결국 1959년, 무장투쟁을 기치로 내건 ETA를 조직합니다.

엄혹한 독재 시절, 에타의 활동은 신출귀몰했습니다. 1973년 프랑코의 후계자인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를 암살하는 등 주요 인사 암살과 테러를 쉬지 않고 벌였죠.

1975년 드디어 프랑코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럼, 에타는 활동을 멈췄을까요?

2011년 무장 투쟁을 중지하고 합법적 운동을 하겠다며 기자회견을 하는 ETA

2011년 무장 투쟁을 중지하고 합법적 운동을 하겠다며 기자회견을 하는 ETA

“프랑코 사후 ETA는 점차 단순하지만 강력한 테러 조직으로 타락해갔다. 말 그대로 ‘세금’을 갈취하는 방식으로 테러 자금을 조달했다. 백화점을 폭파하겠다고 협박하거나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살해하겠다는 위협을 가해 돈을 뜯어냈다.” (책 『유럽사 산책』 1권에서)  

특히 2000년대 초반에는 거의 매주 한 번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스페인을 표적으로 한 공격보다는 바스크인을 향한 테러가 점차 늘어났다”(같은 책)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이들의 활동은 목적을 잃고 부유했죠.

에타는 공포와 동의어가 됐고, EU와 미국은 이들을 테러단체로 규정했습니다.
60년 간 민간인을 포함해 무려 829명이 사망하고 1000명 가까이 다쳤으니 그럴 만도 했죠.

바스크 사람들도 지쳐갔습니다.
독립은 요원해 보이는데 테러로 매일 불안하고 지역 이미지는 실추됐습니다.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죠.

결국 스페인 중앙정부와 에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지난한 협상을 시작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영화 ‘이웃집 테러리스트’는 이 협상 막바지, 에타의 전투력(?)이 약화했을 때의 상황을 코믹하게 그린 작품이죠.
마르틴과 동료들은 점점 ‘꼭 이런 방식으로 싸워야 하나?’ 회의하게 됩니다. 당시 에타 대원들의 마음이 그랬을지 모르죠.

ETA가 지난달 20일 공식 해체 관련 성명을 내자 지역 일간지들이 이를 일제히 보도했다. [연합뉴스]

ETA가 지난달 20일 공식 해체 관련 성명을 내자 지역 일간지들이 이를 일제히 보도했다. [연합뉴스]

그리고 2018년, 이런 ETA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겁니다.
물론 바스크의 아픔이 완전히 치유된 것도 아니고, 이들이 독립을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오랫동안 너무 큰 고통을 겪었기에 일단 화해와 회복에 집중하는 거죠.

『유럽사 산책』을 쓴 언론인 헤이르트 마크가 바스크 출신 사회학자와 나눈 대화를 읽으면 짐작이 갑니다.

“바스크인들은 평범한 삶을 꾸려가다 갑자기 교도소에 수감되거나 마드리드로 인해 인생의 파멸을 겪은 친구 혹은 형제, 사촌을 한둘쯤은 알고 있습니다. 자동적으로 민족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스페인에서 기록적인 흥행을 한 ‘스패니쉬 어페어’가 코미디 영화임에도, 바스크인들의 이런 설움을 담아낸 건 그 때문입니다.
영화 속 고집불통 할배 콜도는 이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겪은 세대거든요.

참, 아까 말씀드린 그 난감한 상황을 라파엘은 어떻게 타개했을까요?

영화 '스패니쉬 어페어2'의 한 장면. 바스크 출신 콜도(오른쪽)가 마드리드에선 죽어도 못 내리겠다고 주장하자 라파엘이 달래고 있다.

영화 '스패니쉬 어페어2'의 한 장면. 바스크 출신 콜도(오른쪽)가 마드리드에선 죽어도 못 내리겠다고 주장하자 라파엘이 달래고 있다.

네… 라파엘은 콜도를 업고 기차를 갈아탑니다.

사실 바스크는 아픈 역사로만 설명하기엔 아까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입니다.
금융업 등이 발달한 부자 동네인데다 미식가의 진정한 성지로 꼽힐 뿐 아니라 미드 ‘왕좌의 게임’ 촬영지였을 정도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거든요.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또한 이 지역의 자랑거리입니다.

바스크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사진=구겐하임 미술관 홈페이지]

바스크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사진=구겐하임 미술관 홈페이지]

무엇보다 이곳에는, 비록 독립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안정된 경제를 이룩하고 종국엔 평화를 지켜낸 매력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바스크 무장 투쟁의 종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바스크 주민들은 거리로 나와 항의했습니다. 대다수 주민은 ETA의 어떤 행동도 정당화하지 않았죠.”  

결국 지금의 평화를 이룩한 건, 평범한 대다수의 바스크 사람들이었단 얘깁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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