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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노동 무임금’ 지키고, 직원 한 명도 해고한 적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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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호 24면

네이버·중앙일보 공동기획 [인생스토리] ② 민계식 현대학원 이사장

논문 280편, 지식재산권(발명특허·실용신안) 300여건, 기술보고서 90여권.

현대중 대표이사 10년 #연 27% 성장 조선업 전성기 이끌어 #논문 280편, 지재권 300건 성과도 #어렵게 미국 유학생활 #화장실 청소하고 접시 닦으며 공부 #힘들어도 희망을 품고 버텨야 이겨 #구조조정 없는 경영철학 #미국의 냉정한 해고 문화 경험 덕 #‘잘릴 걱정 마라’ 명예퇴직 안 시켜

학자의 업적이 아니다. 국내 최대 조선사인 현대중공업에서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한 민계식(76) 현대학원 이사장의 학문적 성과다. 그는 경영자로서는 드물게 미국 명문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기업에서 최고경영자(CEO)까지 역임했다. 그가 재직하던 당시 현대중공업은 10년 동안 연평균 27.4% 성장했다.

당시 세계를 호령했던 한국 조선 산업의 이면에는 연구개발(R&D)과 기술 확보를 강조했던 민계식 이사장이 자리한다. 현대중공업에서 근무했던 22년 동안 그는 매일 업무가 끝나면 새벽 2시까지 논문을 읽으며 신기술을 기업에 접목했다. 2001년 세계일류상품을 단 1개만 보유했던 현대중공업은 그가 퇴직하던 해(2011년) 이 상품 개수를 34개로 늘렸다. 현재 현대중공업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세계 일류상품을 보유한 기업이다. 기술 우위 덕분에 한국은 독자적인 선박 설계 자립 국가로 올라서는 것은 물론, 세계 1위로 부상할 수 있었다. 4월 18일 민계식 이사장을 만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는지 물었다.

지난달 18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민계식 현대학원 이사장. 그는 최근 기업들이 시행하고 있는 강제 희망퇴직 제도가 사내 분위기를 저해해 업무 효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역설했다. [최정동 기자]

지난달 18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민계식 현대학원 이사장. 그는 최근 기업들이 시행하고 있는 강제 희망퇴직 제도가 사내 분위기를 저해해 업무 효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역설했다. [최정동 기자]

5살 때 이순신 위인전 읽고 조선업에 관심

한국 최초 과학기술유공자 32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어떤 상인가.
"존경할 만한 업적·생애를 남긴 과학기술인에게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수여하는 상이다. 현대중공업 회장 시절 한국 조선 산업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을 감안했다고 들었다.”
경영자로서 업적뿐만 아니라, 기술자로서 업적도 상당해야 받을 수 있는 상이다.
"현대중공업 부사장 시절 선박용 중형 디젤엔진을 독자적으로 개발해서 국산화에 성공한 적이 있다. 매년 수천대씩 팔리는 ‘힘센엔진’이다. 힘센엔진은 현재 동급 엔진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다. 쿠바에서는 이 엔진을 사용한 발전기가 전력난을 해소하면서, 쿠바 화폐(10페소)에도 이 엔진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 초대형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과 초대형 컨테이너 등을 개발했다.”
평생 조선업에 헌신했는데, 어떤 계기로 조선공학에 관심을 가졌나.
"5살 때 이순신 장군 위인전을 읽으면서 처음 조선산업에 관심을 가졌다. 3면이 바다인 한국이 부국(富國)으로 발전하려면 바다와 관련한 일을 해야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보면 해군이 강할 때 한국은 융성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평생 사료를 수집해서 ‘임진왜란과 거북선’이라는 책도 최근 출간했다.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고등학교 1학때는 조선해양학을 전공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때부터 한국 조선업을 세계 최고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며 평생을 살았다. 또 국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 가치관에 위인전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 캘리포니아(UC) 버클리주립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시절 경험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너무 고생해서 자주 이야기하지 않는다. 첫째 아들이 조산이었다. 출생 당시 몸무게가 1.2㎏에 불과해서 3개월 동안 인큐베이터에 있었는데 병원비(2만3000달러)가 큰 부담이었다. 갖은 막노동을 했다. 음식점에서 청소를 하고, 백화점 여자 화장실 변기를 뚫었다. 델몬트 공장에서 깡통을 만들고, 부두에서 선박에 실린 짐을 내리거나 샌프란시스코까지 트레일러를 왕복운전했다. 그러다보니 수업을 못 들었다. 낮에는 돈을 벌고, 밤이면 오스트리아 유학생 친구의 노트를 빌려 공부를 했다.”

독자 개발 ‘힘센엔진’ 쿠바 화폐에 실려

민계식 현대학원 이사장은 현대중공업 회장 시절 임직원과 마라톤을 즐겼다. [사진 민계식]

민계식 현대학원 이사장은 현대중공업 회장 시절 임직원과 마라톤을 즐겼다. [사진 민계식]

졸업 후 어디서 일했나.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소재 군함 설계 기업 리톤선박시스템에 입사했다. 여기서 미국의 냉정한 해고 문화를 경험했다. 설계 프로젝트 하나가 끝나면 수백개 책상에 해고를 요구하는 흰 봉투가 쫙 뿌려진다. 아침에 출근해서 본인 책상에 봉투가 있다면 나가라는 뜻이다. 다행히 나는 해고를 당하지 않았지만, 해고당한 동료들이 퇴사 후 기업에 악담을 퍼붓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다. 당시 고용안정이 노동자뿐만 아니라 기업에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경험은 후일 현대중공업에서 경영을 할 때, ‘해고하지 않는다’는 경영철학의 바탕이 되었다.”
 단 한 번도 해고를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정말 한 명도 내 손으로 해고 한 적이 없다. 현대중공업 회장 시절, 매년 인사부가 100여명 안팎의 명예퇴직자 명단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중 30~40명은 반드시 명예퇴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는 이들을 일일이 면담해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물었다. 이들을 가고 싶다는 부서로 재배치하면 대부분 다시 신나서 열심히 일하더라. 이 과정에서 본인이 일하고 싶지 않다며 자발적으로 퇴사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내 손으로 정리한 사람은 없었다. 강제로 명예퇴직을 추진하면 사내 분위기가 뒤숭숭해져서 오히려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 차라리 ‘잘릴 걱정 말고 일만 열심히 하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경영자 입장에서도 더 효율적이었다.”
최근 노사갈등으로 고통을 겪는 한국 사회에 시사 하는 점이 많아 보인다.
"10년 동안 현대중공업 대표이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 비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파업에 참여해도 나중에 급여를 보전해줬다. 그러니까 죄다 파업에 동참했다. 하지만 내가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철저히 지키자 무리하게 파업하던 관행이 사라졌다.

대신 필요하다면 사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과 싸워서라도 근로자들의 기본적인 복리후생은 철저히 지켜줬다. 회사가 소유한 땅에 아파트를 지어서 반값에 근로자들에게 분양했다. 신입사원도 무이자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내가 대표이사 시절, 아파트를 갖고자 했는데 못 가진 직원은 한 명도 없는 걸로 안다.

또 구내식당 자율배식제도 만족도가 높았다. 현장 근로자들은 ‘뱃심으로 일한다’고들 한다. 이를 감안해서 음식을 나눠주는 대신, 자율배식을 하도록 했다. 구내 식당 개수를 12개에서 48개로 늘리고, 근로자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식당 메뉴를 결정했다. 한국 사람은 신명나면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한다. 복지를 늘리자 생산성이 크게 향상했다.”

재직 시절 직원들과 대화하는 민 이사장. [사진 민계식]

재직 시절 직원들과 대화하는 민 이사장. [사진 민계식]

 현대중공업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쉬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처음엔 온갖 음해성 투서가 난무했다. 당시엔 협력업체로부터 뒷돈을 받는 관행이 있었는데, 이를 전면 금지했기 때문에 적이 많았다. 하지만 체질적으로 술 한 모금도 못하고 골프·관광 한 번 안 하고 업무에 매진했더니 오해가 모두 풀렸다. 통상 저녁 6시까지 회사 업무를 하고, 직원들을 퇴근시킨 이후에는 새벽 2~3시까지 논문을 썼다. 일주일에 한 두차례는 논문을 쓰다가 밤을 지샜는데, 이 때문에 직원들은 나를 ‘최후의 퇴근자’라고 불렀다.”
인생에서 반드시 지키고자 했던 원칙이 있다면.
"부정부패 없는 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만, 정말 그렇게 살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국민성은 장점이 많다. 부지런하고 악착같이 일하고 정이 많다. 다만 딱 세 가지가 문제다. 첫째,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려 들지 않는다. 둘째, 공정한 경쟁(fair play)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아무리 경쟁자라도 무조건 발목 잡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대국적인 태도가 부족하다. 작은 문제로 목숨 걸고 싸우지 말아야 한다. 원대한 목표를 이루려면 작은 부분은 희생하거나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 세 가지만 보완한다면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민족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한국인, 배려·공정·대국적 태도 보완해야

 젊은이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희망을 가져야 한다. 유학 시절 엄청난 병원비를 갚아나갈 땐 정말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수모를 당할 때 비웃는 사람도 많았다. 버클리에서 같이 공부했던 한 한국인 유학생은 내가 접시를 나르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더니 나를 보며 ‘우째 이런 일을 하노. 내사 죽어도 몬한다(왜 이런 일을 하니. 나는 죽어도 못한다)’라고 핀잔을 주고 가버린 적이 있다.

이때 나를 버티게 했던 건 희망이었다. 그놈이 가버린 뒤 닫힌 문에 대고 나는 ‘인마, 내가 평생 접시 닦을 줄 아냐? 나도 꿈을 이룰거야’라고 소리쳤다. 요즘 젊은이들이 취업도 힘들고 사회생활도 어려울 수 있다. 이때 참고 버텨야 한다. 잘 참는 사람은 결국 이긴다. 큰 일을 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희망을 잃지 말고 버텨라.”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민계식 현대학원 이사장은
1965년  서울대 조선항공학과 졸업
1967년 대한조선공사 설계기사
1970년  UC 버클리캠퍼스 대학원 조선공학·우주항공학 석사
1978년  MIT 대학원 해양공학 박사
1979년 대우조선공업 전무
1990년  현대중공업 기술개발담당 부사장
2000년  현대중공업 기술개발본부장 부사장
2001년  현대중공업 기술개발본부장 겸 CTO 사장
2004년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부회장
2010년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회장
2013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해양시스템공학전공 초빙교수
2018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유공자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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