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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김정은 언어의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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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김정은의 언어 풍광은 강렬했다. “잘 연출됐습니까.” 문재인 대통령은 금강산 그림을 소개했다. 평화의집 2층 회담장에 시선이 집중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돌아서며 그런 농담을 던졌다.

서사시적 색채로 변신 시도 #말의 외양은 대담하나 #내부는 복선과 안전장치 #비핵화 핵심은 회색지대에 #‘북한 3대’ 모두 만난 임동원 #“평화협정이 평화 보장 못해”

북한은 시네마 통치 국가다. 극장식 통치술은 그의 아버지 김정일 시대 작품이다. 핵심 요소는 권력 의지의 단련과 선전·선동의 연출이다. 그 바탕에서 노출하는 말의 진폭은 크다. 가벼운 유머부터 경건한 교리까지다. 어떤 면은 드러내고 감춘다. 파격과 돌출이 작동한다. 그 크기만큼 언어의 파괴력은 커진다. 그런 언어 구사는 권력의 장엄함을 추구한다.

김정은의 언어는 도발적이다. 그의 판문점 선언 연설은 서사시적 색채로 꾸몄다. 또렷한 발음에다 묵시록적 감성을 섞었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이 평화의 상징으로 된다면 하나의 핏줄, 하나의 언어, 하나의 역사, 하나의 문화를 가진 북과 남은 본래대로 하나가 되어….” 그의 이미지는 세습과 숙청, 경멸이다. 그 무대는 그런 인상을 깨려 했다. 친근감과 경이(驚異)로 전이시키려는 수완이 발휘됐다.

김정은의 4·27은 절정에서 반전(反轉)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완성했다. 북한은 핵을 ‘정의의 보검(寶劍)’으로 규정했다. 북한 핵 능력은 파키스탄을 추월했다. 파키스탄의 압둘 칸 박사는 2000년대 초 북한에 핵 기술을 제공했다. 북한이 남한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시점이다. 북한은 만회를 작심했다. 수단은 핵 개발이다.

보검 제조는 고난의 과정이었다. 주민의 굶주림과 체제 억압은 이어졌다. 핵 포기 약속 파기, 기만과 속임수에다 불량국가로 지탄을 받았다. 지난해 말 간난을 뚫고 성취했다. 그 정점(頂點)에서 그는 거대한 변신을 얘기한다. 판문점 선언의 ‘완전한 비핵화’ 조항이다. 젊은 영도자는 핵 야심과 집념을 허물고 있다. “미국과 신뢰가 쌓이고 종전과 불가침을 약속하면 왜 우리가 핵을 가지고 어렵게 살겠느냐.” 그 ‘사변(事變)적 조치’가 수정주의 노선으로 굳어질 수 있을까.

박보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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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은 마법을 부린다. 김정은은 국제사회에서 대접을 받고 있다. 핵무장 덕분이다. 핵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냉혹한 역설이 적용된다. 김정은의 위상은 기괴한 빈국의 지도자일 뿐이다. 핵은 세습 권력의 유지 수단이기도 하다. 내부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독재 권력의 생리는 공포의 과시다. 핵이 없으면 으스댐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실천 가능할까. 결정적 요건은 모호하고 미지수다.

김정은 언어의 외양은 대담하다. 내부엔 정교한 안전장치가 있다. 조건과 복선이 깔렸다.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남북한의 문법은 다르다. 북한은 ‘조선반도(한반도) 전체의 비핵화’다. 북한 핵무기의 선제적 해체가 아니다. 2016년 북한은 조건을 제시했다. 그중에 미국 핵 타격 수단의 조선반도 전개 중단, 주한미군 철수 선포가 들어 있다. 대상은 핵 항모, 핵 잠수함과 전략폭격기다. 북한 비핵화의 실천 과정은 복잡다단할 수밖에 없다. 그의 언어는 전략적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다.

북한은 “북부(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내놓았다. 그 내용은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4월 20일) 결의다. 결정서에 과거 ‘림계전’ 핵 시험 부분도 있다. 임계전(臨界前·subcritical test)은 수퍼컴퓨터 모의실험이다. 북한은 핵보유국이다. 이제 대규모 지하 시설은 필요없다. 풍계리의 임무는 종료됐다. 붕괴·사용가능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추가 실험이 필요하면 어렵지 않다. 임계전 시험으로 대체한다. 풍계리 실험장 폐쇄의 의미는 상징적이다. 하지만 실질 효과는 제한적이다.

판문점 만찬장은 풍성했다. 문정인 대통령 특보의 표현은 절묘하다. “남북 정상회담 관계자들의 OB 모임 같다.” 그 자리 최고 연장자는 임동원(84) 전 국정원장이다. 18년 전 그는 6·15 정상회담의 최고 실무자다. 지금은 남북 정상회담 원로자문단 단장. 그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북한 통치자를 모두 만난 셈이다. 그의 회고록(『피스 메이커』)에 이런 부분이 있다. “베트남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평화협정을 체결한다고 평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평화를 담보할 실질적 조치가 필수적이다. … 그것은 적대관계 해소, 비핵화, 군비통제 등이다.”

4·27은 역사 흐름을 바꾸고 있다. ‘문재인의 운전대’는 전환기적 기회를 낚아챘다. 비핵화 문제는 앞으로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에서 결판난다. 하지만 핵은 북·미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의 사활이 걸려 있다. 역사의 주인 자세가 요구된다. 그 마음가짐은 북핵의 검증·폐기에 공세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절제와 균형감각을 생산한다. 평화로 가는 실질적 조치를 마련해 준다.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