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北 '비핵화 패' 안깠는데…南 '미군 철수'까지 거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에 대한 장밋빛 시나리오가 쏟아지면서 과속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북한 비핵화의 실질적 조치가 시작되기도 전에 ‘속도전’식 대북 접근을 하다간 오히려 최대 과제인 북핵 문제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있다는 우려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오전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오전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2일 주한미군 주둔의 원칙을 재확인한 것도 이런 걱정을 반영한 것이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가 언론 기고문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의 주둔을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 데 대해 문 대통령은 “주한미군은 한·미 동맹의 문제다. 평화협정 체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밝혔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해당 발언을 문 특보에게 전화로 전달했다고 한다.

실제로 북한이 비핵화를 위해 취한 조치는 말 뿐이고 실질적 행동은 아직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문 특보가 한·미 동맹의 본질과 직결되는 주한미군 철수까지 거론한 건 납득할 수 없다는 비판이 야당은 물론 여권에서도 나온다. 특히 이는 그간 북한이 제기해 온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면 주한미군이 주둔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 말려드는 격이 될 수 있다.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 [연합뉴스]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 [연합뉴스]

북한의 주장과 달리 주한미군의 주둔 근거는 정전협정이 아니라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있다. 조약의 목적은 ‘어떤 잠재적 침략자도 한·미 중 한 나라가 태평양 지역에서 고립돼 있다는 환각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과 ‘태평양 지역에서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주한미군은 한반도 뿐 아니라 태평양 전역에서 발생하는 침략으로부터 동맹을 보호하기 위해 주둔한다.

때문에 북핵 폐기가 시작도 되기 전에 주한미군 철수 논란이 불거지는 것은 본말전도일 수 밖에 없다.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는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분위기 조성부터 해야지, 현 상황에서 국회 비준을 서두르거나 주한미군 철수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그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미군의 해외 주둔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표출했던 점에 비춰볼 때 북핵 포기와 주한미군을 등가로 놓고 거래할 가능성까지 있는 상황인 만큼 우리가 차분하게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당에서는 문 특보의 해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2일 “핵 없는 한반도 실현이라는 판문점 선언이 결국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핵우산 철폐를 의미한 것이냐”고 따졌고, 박주선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도 “대통령 특보라는 사람이 평화협정시 주한미군 주둔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평화체제 구축 논의의 속도가 비핵화 추진을 앞지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평화체제 확립은 북핵 폐기가 완결되는 종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포괄적 비핵화 합의를 하더라도 실제 이행과정에는 동결-불능화-폐기로 이어지는 단계별 이행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불가피한데, 지금은 북한을 마지막 단계인 폐기까지 단기간 내에 끌고 갈 로드맵을 마련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긴밀한 협의와 조정이 필수이며, 우리가 북핵 문제 당사자로서 더 강하게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 폐기)의 관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판문점 선언 이후 대북 경협 준비가 활발해지는 분위기도 속도 조절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빠르게 추진하라”고 지시했다(4월30일수석보좌관회의).

문제는 정부가 남북관계 복원에 조바심을 내면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제재 구도에서 이탈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에게 ‘핵을 완전히 포기하면 제재가 해제되고 이런 것들을 해줄 준비가 돼 있다’고 그림을 보여주는 것은 필요하다. 다만 한국이 비핵화와 상관 없이 이를 추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 않도록 정부가 신중하게 메시지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비핵화에 속도를 내려면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로 한 주변국과의 협력도 필수다. 하지만 요즘 중국의 역할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판문점 선언에서 평화체제 구축 논의의 당사자를 굳이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라고 명시하거나 “종전선언에 중국이 꼭 주체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한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2일 청와대 관계자)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중국을 자극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은 미·중 사이의 대립을 유도하면서 양측 모두로부터 몸값을 올리는 전술을 자주 취해왔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어렵게 만들어낸 남북정상회담인 만큼 그 결과에 도취되지 말고 차분하게 주변국의 협력을 얻어 실질적 성과로 이어가야 한다. 중국의 불쾌감이 높아져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해 9일 열릴 한·일·중 정상회의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형석 전 통일부 차관은 “지금은 반대의견이나 우려에 대해 옳다 그르다 갑론을박할 것이 아니라 우려가 현실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북한의 의도나 향후 상황을 예단하지 말고 비핵화라는 목표를 더 명확히 하며 한걸음씩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지혜·박유미 기자 wisepe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