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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소설이 몰려온다…이혼 소송 다룬 장편 『벗』 출간

중앙일보

입력

이혼 소송을 소재로 한 북한의 베스트셀러 소설 『벗』.

이혼 소송을 소재로 한 북한의 베스트셀러 소설 『벗』.

"그래, 순희 동무는 리혼 주장이 뭡니까?"
"?…"
녀인은 판사의 말을 리해(이해) 못한 듯 잠시 의아쩍은 표정을 지었다.
"왜 남편과 갈라지려고 하는가…말하자면 리혼 근거지요. 여기 문건에는 '리혼 청구 내용'으로 되였습니다."
정진우는 펜으로 문건에 방아를 찧으며 부드럽게 설명했다.

동무, 녀인, 리해(이해) 등의 단어에서 대화가 이뤄지는 공간이 북한의 이혼 법정임이 짐작된다. 이혼을 소재로 한 북한 장편소설 『벗』의 한 대목이다. 대표적인 인기 작가인 백남룡(69)의 1988년 소설인 『벗』은 상투적이지 않은 소재와 내용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이라고 한다. 급격한 남북 정세 변화 와중에 최근 재출간됐다. 아시아 출판사의 아시아문학선 16번째 작품이다. 『벗』은 1995년에 이미 국내 출간된 바 있다.
 북한과의 심리적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지만 북한에서의 이혼 소송은 국내 독자들에게 생소하다. 우리는 북한을 너무 모른다. 하지만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도 사람 사는 세상인 이상 이혼이 진작부터 있었다고 한다. 남편이 폭력적이거나 외도를 하는 경우 결국 같이 살 수 없는 것 아니겠냐는 지적이다.
 소설은 이렇게 이어진다.

"저는 …남편과 의가 맞지 않습니다. 벌써 여러 해째 됐어요. 참고 참다가…인젠 더는 그대로 살 수 없어요."
또다시 설분이 터질 듯 녀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벗』의 작가 백남룡.

『벗』의 작가 백남룡.

아내가 이혼 사유를 밝히는 장면인데, 남한 독자의 예상을 또 한 번 벗어난다. 서로 "의가 맞지 않"아 이혼하려 한다는 거다. 남한으로 치면 성격 차이쯤 된다. 누구나 같이 살 수 없다고 인정할 만한 급박한 사유가 아닌, 상대적으로 덜 급박한 이유로도 이혼 소송이 제기될 만큼 북한사회가 여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소설은 노동자 출신이지만 예술단 가수로 화려하게 변신한 아내 채순희와, 아내와 달리 고지식하게 선반공 일을 고집하는 남편 리석춘의 갈등이 뼈대다. 채순희는 남편에게 야간대학에 진학할 것을 요구하며 지성적으로 새로워질 것을 바라는 반면, 리석춘은 아내가 허영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둘의 갈등은 현명한 판사 정진우가 개입해 결국 해소되는데 그 과정에서 북한 관료주의의 문제점을 건드린다. 이혼 소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도의 고위간부를 통해서다. 정작 작가 백남룡씨는 올 수 없었던 2일 기자간담회 자리. 북한 문단 내부 사정에 밝은 소설가 정도상씨는 "결국 소설은 진정한 삶의 벗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정진우 판사가 진짜 벗이라면 관료주의 폐해에 관련된 인물들은 가짜 벗이다.
 이혼소송이 버젓이 벌어지고, 관료주의의 폐해를 비판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런 상황의 '물증'처럼 놓인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쨌든 『벗』은 북한 당국의 사후 검열을 통과한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북한 예술의 지상과제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체제 선전에 봉사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정도상씨는 "북한의 주체문학이 갖고 있는 정치성이 있는데, 그걸 신경 쓰다 작품의 내적 균형을 깨트리는 경우가 많다. 백남룡씨는 그런 부분을 잘 쓰는 작가"라고 평했다. 아시아문학선을 기획하는 소설가 방현석(중앙대 부총장)씨 역시 "북한 체제의 한계 속에서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치로 끌어올려 상투적이지 않으면서 자기 문학성을 구현한 작품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용기 있게 관료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체제가 요구하는 균형감을 갖췄기 때문에 작품이 용인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곧 출간되는 북한 장편소설 『청춘송가』의 작가 남대현.

곧 출간되는 북한 장편소설 『청춘송가』의 작가 남대현.

 아시아출판사는 북한 소설책을 네 권 더 출간할 예정이다. 백남룡의 또 다른 장편 『60년 후』, 남대현의 장편 『청춘송가』 1·2권, 또 『북한단편소설선』을 출간한다. 방씨는 "『청춘송가』는 북한 청년들의 연애 교과서 같은 작품, 『60년 후』는 당의 통보를 받고 식료품 공장 사장에서 정년 퇴임한 후 허망해하는 인물을 다룬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역시 예사롭지 않은 내용이다.

 정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벗』을 서구문학이나 한국문학 잣대로 바라보면 이해되지 않거나 낯선 점이 많을 것"이라며 "그런 북한 문학의 특징을 선하게 해석하면 좋겠다"고 했다. 『벗』의 판사가 인민의 벗으로 그려졌다면 남한의 판사는 법률 대리인이라고 해야 할 텐데, 어느 쪽의 모습이 맞느냐는 식의 선악 판단보다는 체제가 다르다 보니 나타난 결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벗』의 국내 판매 인세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통해 북측에 전달된다. 백남룡씨는 아직 자신의 소설 재출간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한다. 쌓이는 인세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이 공탁 형식으로 보관하다 대북한 제재가 풀리면 전달할 예정이다.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은 남북 저작권 교류를 위해 2005년 북측과 합의서를 체결했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재단 이사장을 맡았었고, 신동호 현 청와대 연설비서관이 관여했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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